망가진 나를 비로소 인정했다.
갖은 수단으로 죽으려 했지만 살아남았고, 결국은 지쳐 죽을힘도 없어진 때였다.
하루는 정말 손 하나 꼼짝하기 싫어 나흘을 씻지 않았고, 사흘 굶었으며, 이틀을 밤 새운 날이었다. 침대에 멍하니 누워있는데 휴대폰 캘린더 알림이 울렸다. 주마다 돌아오는 정신과 외래 진료날이 된 것이다.
한참을 휴대폰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던 나는 몸을 겨우 일으켜 세웠다. 삶의 절벽에 선 그때도 나는 약속 잘 지키는 버릇은 남아있었다. 진료 예약도 병원과의 약속이니까 지켜야 했다.
샤워할 힘이 없어서 머리만 감았다. 그리고 머리 말릴 힘이 없어서 드라이기는 하지도 않았다. 화장을 하려는데 팔레트를 손에서 떨구었다. 자취방 바닥에 팔레트가 엎어졌고 섀도우가 깨져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그걸 멍하니 쳐다본 나는 치우기도 싫어 그냥 팔레트만 주워내고 섀도우는 깨진 그대로 흔적을 놔뒀다. 그 흔적은 마치 내 마음 속의 멍울과도 같았다.
버스틀 타고 지하철역에 가 지하철을 타고, 지하철에서 내려 병원까지 걸어가기 싫었다. 그래서 택시를 탔다.
덜 마른 머리카락을 한 채 멍한 얼굴의 나는 접수를 했고 마침내 진료실 의자에 앉았다. 기본적인 기분 상태와 약 이야기가 끝나자, 주치의 선생님은 내 입에서 나올 이번주의 헛소리를 기다리셨다. 초점 잃은 눈으로 멍 때리던 나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 만약에. 만약에, 제가 입원한다면.. 저는 얼마나 있어야 괜찮아질까요? "
이때서야 나는 내가 단순히 감정기복이 심하고 잠 못 자는 사람이 아닌, 치료가 필요한 정신질환 자라는 걸 인정했다.
폐 전체에 염증이 뒤덮어버리면 사망에 이를 수 있어 입원하는 폐렴 환자처럼, 당장 죽음의 문턱 앞에 위태롭게 서있어 입원치료가 필요한 우울증 환자라는 것을 그간 부정 해왔지만 나는 많이 아픈 환자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나는 저들과 다르다고, 조금 힘든 시기가 찾아왔을 뿐 이겨낼 수 있다고, 정신병원은 정말 심각한 사람들만 입원하는 곳이지 내가 입원할 곳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말 심각한 사람이 나였는데도 말이다.
요양하고 싶었다.
시끄러운 사회에서 벗어나 조용한 공간에서, 남 눈치 보는 것 없이 나를 챙기고, 누군가에게 보살핌 받고 싶은 마음이었다. 갈등과 혐오가 가득한 세상에서 서로 다투고 핍박받기 바쁜 터에서 벗어나 나 홀로 동 떨어지더라도 조용히 안정을 찾고자 했다. 눈치 없이 먹고 싶을 때 양껏 먹고, 졸리면 낮이건 밤이건 자고, 책을 읽건 그림을 그리건 샤워를 하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개강을 보름 남짓 남겨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료 계획을 세우면서 동시에 학교 일정도 조율해야 했다.
정신병원 입원은 처음이라 일반 병원 입원처럼 길어도 2주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실 이때까지도 나는 심각성을 부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미 정신과 병동은 입원 일수가 하루 개념이 아닌 몇 주, 몇 달 단위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주치의 선생님 입에서 나온 말씀은 "짧게는 한 달, 길게는 세 달 정도 입원 하셔야 해요. 그래도 나아지지 않으시면 퇴원했다 하루이틀 뒤 재입원 하시는 방법 있습니다."였다.
예? 한 달이라고요? 저는 1~2주 생각했는데요. (당황)
변수였다. 최소 한 달이면 질병휴학도 안된다. 4주까지 인정되는데 최소 4주면 어쩌자는 거지. 그래서 속으로 '아. 역시 입원치료는 나랑 인연이 아닌가 보다.' 했고 지금처럼 바깥활동 최소화 하며 약물을 다양하게 써보는 방향으로 치료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행정팀에 말해놨으니 나가셔서 입원 예약 안내받으세요."
아니, 선생님. 저 가족이랑 입원에 대한 상의도 아직 다 안 끝냈습니다만?
그때까진 내가 얼마나 입원해야 하는지 알아보기까지만 부모님이랑 이야기된 상태였다. 그 이상은 아예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다짜고짜 입원 예약이라니. 당황스러운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학병원이 아닌 개인병원이라 그런가, 내가 생각한 입원 웨이팅 기간도 없이 그냥 금요일에 진료 받았는데 그 다음주 수요일에 바로 입원이 이루어진다. 너무 빠른 전개에 나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다행히 내 상황을 헤아려 주신 입퇴원 업무 담당자 선생님께선 변동사항 있으면 입원 전날까지 알려달라 하셨다.
병원을 나온 나는 고민했다. 그냥 없던 일로 할까.
하지만 이때의 나는 지금 내가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일단 목숨이라도 붙여놓고. 나한테 맞는 약이 없는지는 보자라는 마음으로 입원을 결정했다. 그리고 학교는 휴학하기로 가족들과 이야기 했다. 정말 죽을까 봐 휴학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