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언
세이고의 메시지는 지금까지 나에게 말했던 걸 모두 합친 것보다 길었다. 그는 애초에 누구도 믿지 않았던 것 같다. 내 설계도를 믿었을지언정 나를 믿지는 않았을 거다. 그는 검토 과정에서 이미 그의 바람대로 DNA가 설계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매일 나에게 그렇게 물어봤던 것이고, 그 가능성을 최근까지도 고민했었는데 결국 그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당신이 나를 위해 만들어주려던 것은 인조인간이 아닌 인간이었습니다. 내가 이옴코인을 만든 이유는 소수가 만든 시스템 안에서 소수가 누리는 특권이 부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데, 저는 결국 그 소수와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기계를 만들어주시는 거라면 좀 더 덜했을 죄책감이지만, 당신의 설계도를 볼수록 나를 위한 ‘인간’이 태어날 게 분명 해지더군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 제 모습이 우습지 않습니까. 현재를 부정해서 번 돈으로 그 현재와 똑같은 모습을 만드는 제 모습이..
이옴코인이 완벽해지려면 제가 세상에 없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도 그중에 있지 않았을까 싶고요. 소문은 금방입니다. 당신도 언젠가 제가 위선자였음을 얘기할지 모르고요.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았지만, 제 초심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저는 이런 선택을 했습니다. 1년간 감사했습니다.
이 돈은 당신이 막고 싶어 했던 프로젝트를 위해 써주십시오. 그래도 좀 모자랄 것이니 능력껏 잘 헤쳐나가 보시길 바랍니다. 오랜만에 만난 똑똑한 친구라 대화는 조금 즐거웠습니다.”
보통 이럴 때는 눈물이 나올 줄 알았는데, 멍하기만 했다. 눈에 초점이 잘 맞춰지지 않았고, 누워 있다가 갑자기 일어났을 때 같이 어지러웠다. 벽에 기대앉아서 숨을 고르며 눈을 감았다.
30분쯤 흐르니 두통이 좀 가라앉았다. 이제 2년 남았으니 이러고 있을 틈이 없다. 좀 더 많은 자원이 생겼고, 어려운 숙제도 사라졌다. 나에게 남은 감정은 애도와 슬픔보다는 사명감이 강했다. 생산 효율을 높여야 하고 더 많은 시설을 지어야 한다.
“카토, 모든 시설의 베보(Bebo) 파우치에 전력을 가동하고, DNA를 주입해 줘.”
이제부터 10달 뒤, 첫 베보가 태어난다. ‘프로젝트: 가이아’를 막기 위한 준비를 더 촘촘하게 준비해야 한다. 내가 죽은 뒤에도 이 시설은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인구가 급격히 줄어드는 세계들을 기준으로 추가 설비를 만들었다. 설비를 만들면서 한 가지를 더 고민했다. 이 시설을 영속적일 수 있게 만드는 방법과 추후에 버그를 일으킨 베보를 추적 관찰하는 것이다. 생애 실험 때는 분명 인조인간임을 들키지 않도록 소극적으로 행동하면서 생애를 마감했지만, 생명에 위험을 느꼈던 케이스가 없어서 불안했다. 이때를 대비해서도 추적이 필요할 것 같다.
시설을 영속적이게 만드는 것은 자본금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본다. 카토에게 지난 100년 간의 경제흐름을 분석해서 자본금이 최소 200년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이자를 받던지 투자를 하던지 모두 카토가 알아서 할 수 있다. 단, 새롭게 뭔가 만들어내서 돈을 버는 건 불가능하다. 카토한테 창조 알고리즘을 넣는 순간 펼쳐질 미래는 내 예측을 벗어날 것이기 때문에 투자의 관점에서만 돈을 벌게끔 해야 한다.
그럼 이제 두 번째, 버그를 일으킨 베보 추적을 어떻게 할지다. 한 가지 방법이 머리를 스쳤다.
“카토, 노벨상 운영 정책이 데이터로 남아 있는지 확인해봐 줄 수 있을까?”
노벨상은 20년 전에 재단이 망하면서 끝나버렸다. 노벨의 유산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사업을 진행하면서 명목을 이어온 상이었지만, 2040년대에 모든 사업이 망해버리면서 약 150년을 이어온 노벨의 의지가 끝을 고했다.
나는 카토가 가져온 데이터를 토대로 그동안 수상자들의 IQ를 추적했고, 탈인간급의 IQ가 필요한 영역과 난제들을 나열하여 분석했다. 일단 내가 먼저 풀어보고 안 되는 것들을 나열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대 노벨상 수상자 중에서 나보다 IQ가 높았던 사람은 2명 정도이니 괜찮을 것 같았다.
“카토 내가 죽고 15년 뒤에 세이고 재단을 만들고 세이고 상을 수여해 줘. 노벨상을 본떠서 만들고 수상자한테는 내가 만든 메시지를 전해줘 알겠지?”
세이고라는 이름을 쓰면 홍보는 쉽게 될 거다. 주목도가 꽤 높을 거고, 만약 버그로 연산제한이 풀린 AI가 있다면 세이고상을 수상할 거다. 물론 소심한 친구들이라 접근을 안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옴베이같은 공간에서 익명성을 보장하고 진행한다면 가능할 것 같다.
그 이후에는 내 메시지에 따라서 이런저런 결정들을 하게 될 테니, 최대한 신중히 여생동안 유언을 잘 만들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뭔가 내 나이에 유언을 정리하는 게 그렇게 평범한 일은 아닌데, 이상하게 덤덤한 걸 넘어서 조금 들뜬다. 유머를 담을 고민도 조금 해봤다. 또래들을 웃겨본 적은 없지만 세이고는 나와 대화하다가 두어 번 웃었고, 개그도 시대에 따라 돌고 돌 수도 있으니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열 달이 흐르고, 첫 베보가 태어났다. 태어나서 바로 엄마를 못 보는 것은 이 생명들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지만 보육원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충분한 영양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인큐베이팅했다. 보육원에 옮겨지는 날에는 일대의 CCTV를 모두 해킹해서 아이들을 보육원 앞에 두었고, 날짜를 각기 다르게 하고 시차를 두어서 통일성이 없도록 했다.
이렇게 두 달 동안 미국에만 1천여 명의 베보가 공급됐다. 미국에선 영아를 버리는 사회문제에 대해 연일 심각한 보도를 이어갔고, ‘프로젝트: 가이아’를 기획하고 준비하던 사람들은 회의 빈도가 잦아졌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아 유기에 대한 젊은 층의 문제인식이 옅어지면서 실제로 유기하는 비중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물론 CCTV를 조작할 수 없는 친구들은 결국 대부분 사회의 보살핌 속에서 아이와 잘 살아가기는 했다. 이로 인해 아이가 하늘에서 떨어져 보육원에 나타나고 있다는 의심을 안 하게 된 점은 조금 다행이지만, 이건 사회가 교육으로 잘 해결해줘야 할 몫이다.
그 후, 1년간 인구 감소율은 대폭 개선되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내 몸을 마비시키는 바이러스의 진행 처럼. 난 카토에게 유언을 남길 준비를 했다.
“카토, 이거 문법 좀 체크해 줄래? 혹시 이게 보편적으로 재밌는 지도 봐주면 좋고”
카토는 지난 100년간 이런 유머가 있던 적이 없었어서 미래에도 기대해 보긴 힘들겠다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슬아슬했다. 이 피드백의 마지막이 흐릿하게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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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84년 세이고상이 만들어진 지 3년째 되던 해에 첫 수상자가 탄생했다.
- 3화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