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들어온 단어

박사샤 기자의 시작

by 사샤
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다.


담임 선생님이 가나다순으로 학생들 이름을 한 명씩 부르다 “박사샤”라고 말하면 나는 “네”라고 답하는 약 1.5초간의 대화. 이때가 아니면 선생님께 이름 불릴 일이 거의 없는 학생. 그게 바로 나였다. 눈에 띄게 뛰어나지도, 그렇다고 이렇다 할 말썽도 부린 적 없는 ‘착한 학생 1’이었던 나는 초등학교 6학년에 올라가 우연찮게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어쩌다 토론 수업을 집중적으로 하는 수업 연구반에 배정됐고 반 친구들 사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토론을 잘했다. 모범생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본격적으로 이름이 불리기 시작한 뒤로는 장학금을 받고 중학교에 입학했고, 첫 시험에서 전교 1등을 했다.


그 시절 나 같은 모범생에게 특목고 준비는 필수 관문으로 여겨졌다. 외국어 고등학교에 가려고 했다. 2007년 당시 언론출판계가 만든 아이들의 롤모델은 반기문 UN 사무총장이었다. 반기문 총장처럼 외교관이 돼 글로벌 리더로서 전 세계를 활보하겠다고 다짐했다. 외교관 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외무 ‘고시’를 패스해야 한다기에, 만으로 13살밖에 안 된 그 아이는 ‘외고를 가야만 외교관이 될 수 있겠다’고 어렴풋이 확신하고 말았다. 반 총장 이력대로 서울대 외교학과에 진학하겠다는 그 다음 인생 계획까지 세웠었으니까.


그러나 외고 입시의 벽은, 아무리 하늘 쪽으로 고개를 쳐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높았다. 서울 강북 지역 중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한 수준의 나여서 그랬을까. 물론 포기하지는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지만. 외고 입학 실패는 14살, 짧은 인생을 살며 실패라는 두 글자를 가슴 깊이 새긴 첫 사건이었다.


천국일 것만 같은 세상에 사는 외고 친구들을 상상하며 일반고에 다니는 나는 괜히 위축되곤 했다. 내가 무슨 외교관을 해? 외고도 못 간 영어 실력으로 어떻게 외무고시를 합격할 수 있겠어? 짜증 나게 지금도 국어, 수학보다 영어를 제일 못하는데…. 이렇게 되뇌며 외교관이라는 첫 꿈은 내 곁을 스멀스멀 떠나가고 있었다. 그 찰나였다. 기자. 이 단어가 내 삶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16살이 된 해였다. 좋아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다니는 학원의 수학 선생님이셨는데 우리는 그를 ‘초미녀 쌤’이라고 불렀다. (초특급 미녀, 대충 그런 뜻이었다. 선생님 스스로 명명한 별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미녀 쌤은 사교육에 몸담고 있는 여느 ‘강사’들과 달리, 학생들의 목표 대학보다 꿈에 더 관심이 많은 ‘선생님’에 가까웠다. 언젠가도 그랬듯이 쌤이 나를 학원 빈 강의실로 불렀다. 고삼, 소리 내 읽는 동시에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 단어가 내년에 내게 들어올 예정이었다.


“사샤는 꿈이 뭐야? 뭐가 되고 싶어?” 대략 이런 질문을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끄트머리를 잡고 있는 꿈의 이름을 말했다. “사회에 이바지하고 싶어서, 공익을 위한 일을 하고 싶어서” 따위의 이유도 덧붙였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했다.


그러면 기자를 해보는 건 어때?


16년 전의 일이 마치 어제 벌어진 듯 생생하다면 거짓말이다. 다만 그 순간 심장의 떨림을 기억한다. 기, 자, 한 글자씩 입을 떼어 말하던 선생님의 눈빛과 기운은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여전히 생생하다. 난생처음 느끼는 두근거림에 내가 왜 이러는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게 운명인가, 속으로 혼잣말했던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기자가 됐다.


기자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다면 “정말 운명이었네”라고,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며 감탄할지도 모르겠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사회에 이바지하는 다른 직업도 많은데, 선생님은 굳이 내게 왜 기자를 추천하셨던 걸까? 정말 운명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느덧 7년 차 기자가 된 나는 기자가 꿈이 아니라 직업임을 안다. 장래 희망, 꿈, 직업이 모두 같은 단어라고 배웠던 우리였다. 직업이란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함을, 꿈을 이뤘다고 착각한 지난 6년여의 세월을 지나며 알게 됐다.


그래도 내가 이 직업을 성취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겠지. 기자라는 단어 뒤에 숨어 있는 내 진짜 꿈도 분명 있었을 테다. 직업에 대한 회의감에 젖어들 무렵 뒤늦게 진짜 꿈을 찾아 나섰다. 첫 회사에 들어갈 때 면접에서 받았던 질문과 내 답변을 정리해 놓은 파일을 발견했다. 대학 후배들이 기자 준비를 하며 참고하라고 정리한 입사 지원 후기 글이었다.


“기자가 되고 싶은 이유와 그 계기가 무엇인가요?” 면접관이 물었다. 내 답변 순서는 면접자 중 마지막이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라는 답변이 이미 나온 상태였다.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복기해서 쓴 후기 글 일부를 그대로 옮긴다.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저 역시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기자를 꿈꾸게 됐습니다. 결정적으로 대학 때 학보사 활동을 한 게 계기가 됐습니다. 무엇보다 학보사 기자 생활이 재밌었고 제가 쓴 기사로 대학 사회가 조금씩 바뀌는 걸 보면서 보람도 느꼈습니다. 제가 즐겁게 일하면서도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은 기자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학보사 이후로 지금껏 기자가 되기 위해 꾸준히 정진해오고 있습니다.”


사회에 이바지한다. 그런데 재밌다. 보람도 느낀다.


기자가 되기 직전의 나는 내 꿈을 이렇게 말했다. 외교관이 되려고 했던 나. 기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던 나. 이 둘도 같은 꿈을 꾸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기자가 된 지금의 나 역시 똑같은 꿈을 꾸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한 우물만 파서 기어코 얻어낸 직업인데도 ‘나는 기자가 안 맞다’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 있었다.


이제는 그렇게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이 마냥 재밌는 것도 아니고, 보람마저 별로 못 느끼고 있어서 그랬구나. 꿈을 이루지 못해 이 직업이 탐탁지 않았구나. 놀랍게도 그 옛날부터 참 한결같은 내가, 두근거렸던 내 심장은 2025년에도 줄기차게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사샤 네 꿈은 이거야, 네 꿈을 이뤘으면 좋겠어, 라고 말이다.



절친한테 받았던 첫 직장 입사 축하 꽃다발 사진을 찾았다. 청운의 꿈에 부풀어 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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