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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것들

바다

by 윤담

나는 늘 같은 자리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흐르지만 떠나지 않고,
변하지만 사라지지 않는 방식으로.

수평선은 내 오래된 척추처럼 곧게 뻗어 있었고,
그 위를 인간들이 건너왔다.
작은 배, 큰 배, 너무 빠른 배, 너무 흔들리는 배
그들은 저마다 나를 가르며 지나갔다.

바람은 늘 먼저 그들의 냄새를 알려주었다.
금속의 냄새, 기름의 냄새,
어떤 날엔 술과 피곤함이 섞인 체온의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들이마셨다.
그리고 바깥으로 내보낼 때마다
그들의 하루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파도가 높아지는 날이면
인간들은 내 표정을 읽지 못한 채 허둥댔다.
그들이 던지는 비명과 명령이
철판을 통해 내게 닿았다.
나는 그 흔들리는 발소리를
심장 박동처럼 느꼈다.

그럴 때 나는 늘 같은 생각을 했다.
‘이 작은 생명들은 왜 이렇게 바쁘고, 왜 이렇게 두려운가.’

인간들은 자주 나를 적이라고 부른다.
기록에도 남겼다.
재난, 폭풍, 난파.
그 단어들이 모두 나에게 씌워져 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누군가를 미워한 적이 없다.
나는 다만 움직였을 뿐이다.
달이 끌어당기면 따라 일렁이고,
바람이 지나가면 물결을 세우고,
지구의 속도가 변하면 깊은 곳에서 꿈을 뒤척였을 뿐이다.

나는 내 욕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단지 지구의 숨결에 맞춰 호흡할 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속도를 공포라 부른다.

어느 날,
바다 한가운데를 지나던 작은 배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저물어가는 해가 그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전부 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만은 또렷하게 들렸다.

“괜찮아질까?”
한 사람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들을 때마다
묘한 울림을 느낀다.
인간은 언제나 ‘괜찮음’을 바란다.
마치 스스로를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는 생물처럼.

그의 옆에 있던 사람이
조용히 바람을 바라보며 답했다.
“조금씩은 괜찮아지겠지.
바다도 늘 이랬다가, 저렇게 잠잠해지잖아.”

나는 그 말을 듣고
파도를 아주 미세하게 낮추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 문장을 받아주었다.

인간은 늘 이렇게
자기 앞의 물결을 나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내 표면의 얇은 결에 불과하다.

나는 깊은 곳에서
그들의 조용한 후회와,
그들이 놓친 시간들의 잔열을 느낀다.
배의 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심장박동과 같은 진동들은
언제나 진실했다.

인간은 배 위에서 강한 척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의 숨은 항상 조금 빠르고,
그들의 마음은 항상 조금 흔들린다는 것을.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며
절망을 털어놓고,
누군가는 나를 바라보며
사랑을 떠올린다.
어떤 이들은
나의 깊이를 두려워하며
자신의 깊이도 두려워한다.

나는 그 모든 미세한 떨림을
물결의 결로 받아 적는다.
그리고 바람이 지나가면
그 결은 금방 사라져버린다.
인간이 남겼다고 믿는 모든 것은
내겐 잠시 스쳐가는 진동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다시 찾아오는 이유는 알고 있다.

그들은 잊고 산다.
자신이 얼마나 작고,
얼마나 아프고,
얼마나 견뎌온 존재인지.

나는 그들에게
그 작은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먼지 같은 생명이라도
파도 위에 잠시 빛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어떤 날에는
배가 나를 가르고 지나가는 순간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건다.

“두려워도 괜찮다.
흔들리는 것은 살아 있다는 신호다.
또 지나가면 된다.
나는 늘 여기 있으니.”

하지만 인간은 내 말을 듣지 못한다.
나는 목소리가 없고,
그들은 너무 많은 소리를 가진 생물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내가 던진 말은
그들의 가슴 어딘가에 잔물결로 남는다.

그 잔물이 날이 밝으면
조금은 희미해지겠지만
어쩌면 그들의 마음 밑바닥 어딘가에
아주 작은 투명한 층을 만들지도 모른다.

나는 그걸 안다.
나는 늘 지켜봐왔기에.

배는 떠나고,
흰 물결이 천천히 흩어진다.
나는 다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다음 인간을 기다린다.
그들의 상처와,
그들의 꿈과,
그들의 불완전한 마음이
또 한 번 내 위를 지나가기를.

나는 바다이기에.
그들을 미워한 적도,
그들을 떠난 적도 없다.

다만
그들이 나를 지나가는 그 순간만큼은,
그들의 모든 흔들림을
조용히 품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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