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에 남은 사랑
나는 오래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
비와 바람이 계절을 갈아입는 동안,
낙엽이 쌓였다 흩어지는 동안,
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묵음처럼 이 땅에 박혀 있었다.
묘지란 본래 그런 곳이다.
움직이지 않는 대신
모든 생명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자리.
나는 인간들을 보아왔다.
태어나고, 웃고, 서로를 밀어내고, 다시 붙잡고,
그러다 결국 조용히 이곳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은 나를 두려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자기 삶에서 잃어버린 무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여기에 온다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아침의 묘지는 언제나 고요하다.
사람들은 발걸음을 낮게 들고 다니며
말보다 더 큰 침묵이 필요한 마음을
묵묵히 내려놓는다.
그 순간 나는 인간의 손끝에서
아주 투명한 감정을 읽는다.
슬픔도, 후회도, 사랑도
그 모든 것은 빛처럼 얇고 선명해서
오히려 금세 식어버릴 것 같지만
이곳에서는 오래 머문다.
낮이 되면
묘비에 놓인 꽃 향기 사이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스친다.
누군가는 오래된 이름을 부르고,
누군가는 울음을 눌러 삼키고,
누군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저 손등을 떨며 서 있다.
나는 그 떨림에서
인간이 얼마나 쉽게 상처받고
얼마나 사무치게 사랑하는지를 배운다.
밤이 오면
묘지는 조금 다른 모습이 된다.
바람이 잔잔히 불고
별빛이 묘비의 가장자리를 부드럽게 적신다.
사람들은 거의 오지 않지만
나는 안다.
그들의 생각은 밤마다 조용히 이곳을 건너간다는 것을.
상실은
그들이 떠나도
이 자리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조용한 끈이다.
나는 묘지다.
죽음을 담고 있지만
죽음만을 이야기하는 공간은 아니다.
여기에는
돌보다 오래 남는 온도가 있고,
이름보다 오래 남는 잔열이 있다.
인간들은 자신이 떠난 뒤
모든 것이 사라질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내가 오래 지켜본 바로는
대부분의 인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마음에,
어떤 날의 바람에,
낡은 목소리의 결에
그렇게 조용한 흔적으로 남는다.
그리고 나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을 때마다
조금씩 같은 결을 느낀다.
그들은 누군가를 잃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여전히 이어져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 믿음이 이 자리에 내려앉는 순간,
나는 가끔 아주 미세한 울림을 느낀다.
마치 묻힌 이의 마음이
돌 아래에서 천천히 올라오는 것처럼.
말을 갖추지 않아도,
형태를 만들지 않아도,
어떤 감정은 전해지는 법이다.
나는 그것을 오래 지켜보았다.
그래서, 아주 가끔, 정말로 아주 가끔
누군가가 묘비에 손을 얹고
말없이 숨을 고르고 있을 때,
나는 돌 속에 남아 있는 따뜻함을
그 손끝으로 조용히 밀어 올린다.
그 온기가 무엇인지는
굳이 말로 밝힐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언어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나는 안다.
그 온기가 결국 한 가지 의미로 귀결된다는 것을.
이곳에 누운 이가
아직도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뜻.
한때 살았던 마음이
지금도 조용히 이어져 있다는 뜻.
그리고 그 모든 결이 모여
마지막 한 문장이 된다.
나는 입이 없는 돌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이렇게 알아듣는다.
"너를… 여전히 사랑한다."
나는 그 말을 대신 전해주는 자리일 뿐이다.
묘지는 언제나 그래왔다.
조용히, 천천히, 들리지 않는 방식으로.
그리고 인간은 그 말을 들었는지도 모른 채
눈을 닦고 돌아가지만,
그 울림은 오래도록 그들을 따라간다.
잔열처럼.
지워지지 않는 채,
살아 있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