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연애극장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웃집개구리 Aug 20. 2016

그녀의 '덫' #37

믿음

무경을 찾아, 그의 병실로 향했다.  

천천히 문을 열었는데, 컨디션이 좋은지 표정이 부쩍 밝아 보인다.

날 보자, 환하게 웃으며 노트북을 옆으로 밀어 넣는 무경.


"작업하고 있었어? 오늘은 안경 안 썼네?"


그가 씩 웃으며


"오늘은 렌즈 꼈지."

"난 그게 더 좋았는데, 밥은 먹었어?"


그가 고개를 저으며


"입맛이 없어. 빨리 여기에서 나가고 싶어."

"퇴원 날짜 잡힌 거야?"

"응, 몇 가지 검사 더 하고, 다음 주면 나갈 수 있어."

"잘됐다. 다행이야."


난 그에게 다가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빤히 그를 쳐다보며


"자기야"

"응?"

"자기는  믿지?"

"뭘? 뭐를 믿어?"

"내가 당신을 많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거.  항상 걱정하고, 무엇보다 자기랑 함께 있고 싶은 것."


내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무경.


"사랑고백이야, 아니면 사고 치기 전에 선전포고 하는 거야?"


잊을 뻔했다. 그가 예리한 남자라는 것을.

날 빤히 쳐다보는 그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난 분위기를 바꾸려 애써 밝은 얼굴로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좋아하지는 못할 망정 따지는 거야? 다신 안 해줄 거야. 사랑한다는 말."


그가 당황하며


"자기가 애정표현을 잘 안 하잖아.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 봐."

"됐어. 안 해. 처음 말할 때 반응이 바로 왔어야지. 기분 나빠."


그가 옆에 있던 휴지를 반으로 가르더니 양 쪽 눈에 붙이며,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 나올 것 같아. 한 번만 더해주라."


휴지를 눈 밑에 펄럭이며 쳐다보는 무경.


"나 승주씨랑 약속 있어. 가야 해."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가 슬픈 얼굴로


"싫어 가지 마. 심심하단 말이야."

"다시 올 거야.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에게 손을 흔들며 병실 밖으로 나섰다.






"흥미롭네요. 그런 꿈을 꾸다니."

마주 앉은 승주가 내 얘기를 들은 후 꺼낸 한 마디였다.


"깨어나면 매번 잊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제처럼 생생한 건 처음이었어요. 마치 그 남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날 움켜쥐는 그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떠올라요. 그리고......."


그녀에게 꿈 외에 붉은 눈의 남자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날 괴롭혀 왔던, 악몽보다 더 끔찍한 그 환영들을 누군가에게는 알리고 싶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건, 내 문제니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말해선 안 돼. 누구에게도.'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승주가


"예랑씨?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뭔가 더 있어요?"


난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 그게 다예요."


승주가 내 꿈 얘기를 기록해둔 노트 위에서 펜을 '톡톡' 건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이 부분인 것 같아요. 백 프로 확실하진 않지만, 당신의 꿈이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그 창고 안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상자 안의 아이......"

"무경씨와 관련이 있을까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경이 역시 납치되었을 때, 상자 안에서 죽을 뻔했다고 했으니까.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해보면 알지 않을까요? 언제 할 수 있어요?"


잠시, 날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모니터 화면을 켜더니 손으로 가리킨다.

거기에는 뇌 CT를 촬영한 필름이 보였는데, 그녀가 볼펜으로 한 부위를 가리키며 원을 그린다.


"예랑씨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여기 검게 변한 부분 보이죠? 이건 뇌세포가 다량으로 죽은 거예요. 어떤 충격이나 물리적인 압력에 의해 생길 수 있는데, 일종의 뇌출혈로 보입니다. 알고 있었어요?"


난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몰랐어요."

"이걸 찾아낸 이상, 자칫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어요. 다시 하는 거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저번에도 별 일 없었는데, "

"그건......."


그때, 상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뇌 CT는 뭐고, 또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 좀 해줄래?"


무경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나와 승주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무경아......."


그가 승주를 향해


"이승주 말해 봐. 무슨 꿍꿍인 거야 대체. 너 설마 예랑이한테 최면을 쓴 거야? 나 때문에?"

"앉아. 그렇게 열부터 낼 일 아니야. 앉아서 얘기해."


승주는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지만, 무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넌 누구 주치의야? 네가 내 주치의면 모든 일을 나와 먼저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하려고 했어. 그전에 예랑씨한테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었을 뿐이야."

"내 문제야!  내가 문제라고 이승주.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괴롭혀. 어?"

"뭐? 괴롭혀? 누가 누굴? 너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내가 지금 나 좋자고 이래? 네가 전혀 차도가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너야말로 말해 봐. 요새 너 이상한 거 알기나 해? 평소에 남한테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지 애인 문제라고 사람을 죽도록 패지를 않나. 지금도 그래. 내가 설마 예랑씨 잡아먹을까 봐 이렇게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살벌한 기류에 눌려 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

그 모습에 내가 조심스럽게


"무경씨. 그게 나도 상관이 있는 것 같아. 자기 아픈 거."


획~ 그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 꿈에서 봤거든. 쫓기는 꿈. 아이가 갇혀있는 상자. 자기가 얘기해주었던 그 일을 내가 꿈에서 보았어."

"그건 내가 말을 했기 때문이야. 그 얘기를 듣고 자긴 꿈에서 본 것뿐이고."

"그때 나한테 말해준 건 단순한 몇 가지였어. 그런데 내가 본 건 그 이상이었다고. 아무래도 그때 거기에 나도 있었던 것 같아."


그가 승주를 쳐다보며


"알아듣게 얘기 좀 해줄래?"

"들은 말 그대로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런 징조들이 있어. 그래서 찾고 있었어. 예랑씨와 너.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고리를."


무경이 머리를 감싸며 신음소리를 내더니 승주에게 다가갔다.


"지금 하고 있는 게 뭐든지 간에 그만둬. 분명히 말해두는데 내가 아픈 건 그냥 내 문제야. 네가 정말 내 주치의면 어떻게 되든 간에 나한테서 찾아내라고. 문제가 뭔지, 해결 방법을 찾아 내. 그게 안되면 그만둬. 다른 사람까지 연결시키지 말고. 지금 넌 날 속이고 기만한 거야, 이승주."


그가 싸늘하게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난 온몸에 한기가 서렸다.

승주는 차분하게 무경의 말을 끝까지 듣다가


"그래, 좋아. 그만할게. 네 주치의이건, 네 친구건 그게 뭐든지 간에 이제 다 때려치우고 그만할게. 잘됐네. 나도 이제 너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살 수 있겠어. 너한테 미안해서 그동안 더 잘하려고 했던 건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겠어. 나도 이제 지쳤어. 그만하자."

"그리고 다신 예랑이 만나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너 진짜......!"


승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무경이를 노려보았다.

그에 아랑곳없이 무경이 내 손을 잡으며


"가자, 여기에서 나갈 거야. 정말 지긋지긋해."

"무경씨, 그러지 마."


무경이 내 손목을 잡고 진료실 밖으로 향하였고, 난 그에게 끌려 진료실을 벗어났다.


그가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 문을 열더니 나를 안에 태운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나 퇴원했어. 와서 정리 좀 해줘."


전화를 끊고 운전대를 잡는 무경의 표정이 낯설도록 차갑다.

차가 병원을 벗어나자 조용히 앉아있던 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는데,


"무경씨. 내가 말하지 말라고 했어. 승주씨가 아니고 내가 그랬다고."

"이러려고 아까 나한테 사랑 고백한 거야? 나 바보 만드려고?"

"아니야. 정말 그게 아니라고."

"자기는, 나한테 정말 나쁜 짓을 한 거야.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그가 엑셀을 밝으며 속도를 올렸고, 집으로 가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마치 더 이상의 어떤 대화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의 ''은 연속간행물입니다. 1편부터 보시면 스토리 이해에 더욱 도움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녀의 '덫' #36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