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신을 많이 생각하고, 사랑하는 거. 항상 걱정하고, 무엇보다 자기랑 함께 있고 싶은 것."
내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무경.
"사랑고백이야, 아니면 사고 치기 전에 선전포고 하는 거야?"
잊을 뻔했다. 그가 예리한 남자라는 것을.
날 빤히 쳐다보는 그 앞에서 태연함을 유지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난 분위기를 바꾸려 애써 밝은 얼굴로
"내가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좋아하지는 못할 망정 따지는 거야? 다신 안 해줄 거야. 사랑한다는 말."
그가 당황하며
"자기가 애정표현을 잘 안 하잖아.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 봐."
"됐어. 안 해. 처음 말할 때 반응이 바로 왔어야지. 기분 나빠."
그가 옆에 있던 휴지를 반으로 가르더니 양 쪽 눈에 붙이며,
"너무 감동받아서 눈물 나올 것 같아. 한 번만 더해주라."
휴지를 눈 밑에 펄럭이며 쳐다보는 무경.
"나 승주씨랑 약속 있어. 가야 해."
침대에서 일어나자 그가 슬픈 얼굴로
"싫어 가지 마. 심심하단 말이야."
"다시 올 거야.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그에게 손을 흔들며 병실 밖으로 나섰다.
"흥미롭네요. 그런 꿈을 꾸다니."
마주 앉은 승주가 내 얘기를 들은 후 꺼낸 한 마디였다.
"깨어나면 매번 잊어버리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어제처럼 생생한 건 처음이었어요. 마치 그 남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날 움켜쥐는 그 모습이 지금도 또렷이 떠올라요. 그리고......."
그녀에게 꿈 외에 붉은 눈의 남자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다.
오래전부터 날 괴롭혀 왔던, 악몽보다 더 끔찍한 그 환영들을 누군가에게는 알리고 싶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건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내
'이건, 내 문제니까..... 그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말해선 안 돼. 누구에게도.'
날 물끄러미 쳐다보던 승주가
"예랑씨? 괜찮아요? 얼굴이 창백해요. 뭔가 더 있어요?"
난 그 말에 고개를 저으며
"아니요. 그게 다예요."
승주가 내 꿈 얘기를 기록해둔 노트 위에서 펜을 '톡톡' 건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이 부분인 것 같아요. 백 프로 확실하진 않지만, 당신의 꿈이 그게 전부라면 우리는 그 창고 안에서 열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 상자 안의 아이......"
"무경씨와 관련이 있을까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경이 역시 납치되었을 때, 상자 안에서 죽을 뻔했다고 했으니까. 일치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해보면 알지 않을까요? 언제 할 수 있어요?"
잠시, 날 빤히 쳐다보던 그녀가, 모니터 화면을 켜더니 손으로 가리킨다.
거기에는 뇌 CT를 촬영한 필름이 보였는데, 그녀가 볼펜으로 한 부위를 가리키며 원을 그린다.
"예랑씨 검사 결과가 나왔는데, 여기 검게 변한 부분 보이죠? 이건 뇌세포가 다량으로 죽은 거예요. 어떤 충격이나 물리적인 압력에 의해 생길 수 있는데, 일종의 뇌출혈로 보입니다. 알고 있었어요?"
난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몰랐어요."
"이걸 찾아낸 이상, 자칫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어요. 다시 하는 거 쉬운 문제가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그만둘 수는 없잖아요. 저번에도 별 일 없었는데, "
"그건......."
그때, 상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뇌 CT는 뭐고, 또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말 좀 해줄래?"
무경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나와 승주를 번갈아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내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무경아......."
그가 승주를 향해
"이승주 말해 봐. 무슨 꿍꿍인 거야 대체. 너 설마 예랑이한테 최면을 쓴 거야? 나 때문에?"
"앉아. 그렇게 열부터 낼 일 아니야. 앉아서 얘기해."
승주는 팔짱을 끼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지만, 무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넌 누구 주치의야? 네가 내 주치의면 모든 일을 나와 먼저 얘기를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말하려고 했어. 그전에 예랑씨한테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었을 뿐이야."
"내 문제야! 내가 문제라고 이승주. 왜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을 괴롭혀. 어?"
"뭐? 괴롭혀? 누가 누굴? 너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내가 지금 나 좋자고 이래? 네가 전혀 차도가 없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너야말로 말해 봐. 요새 너 이상한 거 알기나 해? 평소에 남한테는 관심도 없는 사람이 지 애인 문제라고 사람을 죽도록 패지를 않나. 지금도 그래. 내가 설마 예랑씨 잡아먹을까 봐 이렇게 나한테 소리 지르는 거지?"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살벌한 기류에 눌려 난 단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두 사람.
그 모습에 내가 조심스럽게
"무경씨. 그게 나도 상관이 있는 것 같아. 자기 아픈 거."
획~ 그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보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나 꿈에서 봤거든. 쫓기는 꿈. 아이가 갇혀있는 상자. 자기가 얘기해주었던 그 일을 내가 꿈에서 보았어."
"그건 내가 말을 했기 때문이야. 그 얘기를 듣고 자긴 꿈에서 본 것뿐이고."
"그때 나한테 말해준 건 단순한 몇 가지였어. 그런데 내가 본 건 그 이상이었다고. 아무래도 그때 거기에 나도 있었던 것 같아."
그가 승주를 쳐다보며
"알아듣게 얘기 좀 해줄래?"
"들은 말 그대로야.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런 징조들이 있어. 그래서 찾고 있었어. 예랑씨와 너. 두 사람 사이에 연결된 고리를."
무경이 머리를 감싸며 신음소리를 내더니 승주에게 다가갔다.
"지금 하고 있는 게 뭐든지 간에 그만둬. 분명히 말해두는데 내가 아픈 건 그냥 내 문제야. 네가 정말 내 주치의면 어떻게 되든 간에 나한테서 찾아내라고. 문제가 뭔지, 해결 방법을 찾아 내. 그게 안되면 그만둬. 다른 사람까지 연결시키지 말고. 지금 넌 날 속이고 기만한 거야, 이승주."
그가 싸늘하게 한마디 한마디 말을 내뱉을 때마다 난 온몸에 한기가 서렸다.
승주는 차분하게 무경의 말을 끝까지 듣다가
"그래, 좋아. 그만할게. 네 주치의이건, 네 친구건 그게 뭐든지 간에 이제 다 때려치우고 그만할게. 잘됐네. 나도 이제 너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살 수 있겠어. 너한테 미안해서 그동안 더 잘하려고 했던 건데 이제 그럴 필요도 없겠어. 나도 이제 지쳤어. 그만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