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

ADHD도 겨우 이해하고 있는데 난독이라니!

by 그랑

한강을, 존버거를, 열화당을,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을 좋아한다. 옷과 액세서리에 돈을 쓰지 않지만 책과 공책, 일기장, 스케치북은 사고 또 산다. 엊그제도 책상 옆 선반을 정리하다가 연도가 이미 지나버린 다이어리와 필사노트 3개를 발견했다. 포장도 뜯지 않은 엽서와 필기도구들 살펴보니 작년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사 온 것들임이 틀림없다.

읽고 쓰는 물건 거의 모두를 좋아하지만 정작 나는 읽지도 쓰지도 않는다. 마치 수집품처럼 새것인 이 물건들은 안타깝게도 사는 순간 내게 잊혀지고 만다. 변명을 좀 해보자면 읽지 않아도 나는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안다. 오래전부터 좋아했으니 내용 따위가 중요 할리 없다. 오래된 운명 같은 쪽이다. 나는 그것을 대부분 첫눈에 알아본다.

내가 책을 만나는 방식은 '읽기'가 아니라 '감각'에 가깝다. 책 등에 새겨진 예쁜 소리 단어에 자주 마음을 빼앗긴다. 인터뷰나 방송에 나온 프로필 한 줄을 보고 중고서점을 뒤져 그 작가의 품절된 책 모두를 주문하기도 한다. 나는 세상을 빛처럼 밝히는 아름다운 단어를 책이라는 물건을 통해 수집한다. 혹은 사랑에 빠질 것 같은 어떤 작가의 이름을 내 책장에 위치시키기 위해 이 많은 책들을 사고 모은 것이 아닐까 하고 자주 생각한다.

동시에 읽지 않는 것에 대한 무거운 마음이 공존한다. 그저 책 수집가라면 이런 방식도 상관없겠지만 나는 그런 부채를 가질만한 직업적 자리에 있다. 잡지, 단행본, 브랜드 사사를 다수 출간했고 에디터, 편집장이라는 직함으로 오래 책을 만들었다. 게을러서 읽고 쓰는 것을 못하는 줄로만 알았다. 나의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 먹고서도 읽지 못하는 내가 한심했다.


난독이 있다고는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난독이 있는 사람은 정보를 텍스트가 아니라 이미지나 감각으로 받아들인다. ADHD나 초민감자일 수 있고 듣고 말하기 능력은 오히려 더 뛰어 날 수 있다. 그러니까 다시 정리해 보면 나는 감각적인 상품으로써 책을 만들어 왔으며, 뛰어난 듣고 말하기 능력을 발휘하느라 그 수많은 인터뷰를 했고, 읽을 수 없기에 라디오, 팟캐스트와 같은 듣는 콘텐츠를 만들겠다고 집착했던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정보는 그림이나 도식화한 메모를 써 눈에 담는 편이다. 그 장면을 사진처럼 찍고(나의 눈이 카메라가 된다) 다시 떠올리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습관이 있다. 글밥이 많은 책은 자를 이용해 아랫 줄을 가리고 한 줄씩 읽어 내려간다.

제목과 목차를 훑어보고 주요 페이지를 넘기며 그 책을 맥락과 내용을 파악한다. 어차피 읽어도 머릿속에 하나도 남지 않는다. 이 모든 나의 읽기 습관들이 난독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터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는 지난주까지도 전혀 모르고 살았다.

스레드에서 우연히 연이 닿은 <난독증을 읽다>를 쓴 작가님과 긴 통화를 했다. 내 책장에 자리를 만들어 놓은 <민들레>에 이번 달 기고를 하셨다고 했다. 내가 하려는 일에 누군가 호기심을 가질 때 나는 마치 기다렸다렸다는 듯이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낼 때가 있다..


가장 마음에 닿았던 작가의 말은 어떻게 포장해도 이것은 ‘차이’가 아니라 ‘어려움’이라는 것이다. 신경학적 차이를 가능성으로 환원해 사용하자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지만 Adhd, 난독, 아스퍼거, 자페 스펙트럼은 분명 신경 정신과적 장애에 속한다.

아무리 티가 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어려움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것을 신경학적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경다양인 당사자들에게 오히려 희망 고문일 수 있다.

작가님이 직접 짚어 준 부분의 사례를 읽는데 세 달쯤, 아니 그보다 더, 아니 어쩌면 영영 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 신경다양성이라는 세계로 막 들어섰다.

책을 만들지만 읽지 못하는 사람, 일상생활 수행능력이 평균 ‘하’이지만 내가 하는 업무만큼은 세계 최고가 되고 싶은 일 중독자,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소시오 패스, 본론 중심 실체 중심의 대화를 추구하는 진지충, 말도 안 되는 실수를 남발하는 사고뭉치.



"신경다양성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모순 투성이인 나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매일의 일상에서 유심히 바라보게되는 대상, 특별하게 느껴지는 경험, 문득 생각나는 단상들을 기록 중이다. 토끼 선장의 SNS 표류기는 핸드폰이나 노트북으로 후루룩 쓰는 그야말로 SNS 글쓰기다. 그 중 일부는 깊은 밤 부엌에서 목요일 연재글로 수정을 거쳐 조금은 더 완결된 글의 형식으로 발행중이다. 내용이 겹칠 수 있어 지울까 했지만 이 또한 글의 탈고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서 그대로 두기로 했다. 혹시 같은 글이 있자면 독자 여러분은 <깊은 밤 부엌에서>를 읽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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