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로 시작한 캄캄호의 첫 항해 <밤과 꽃>
아보에게
이제야 봄이 오는 것 같아. 오늘은 단지 앞 벤치에서 햇빛을 쬐며 우리의 첫 수업에 대해 오래오래 생각했어, 우리가 준비한 수업에 와주는 사람들은 누굴까, 무엇을 기대할까, 꽃 피는 5월이 역시 제일 좋겠지, 캄캄호 탑승권에 이름을 꼭 새겨야지, 웰컴 티는 무엇이 좋을까, 돌멩이를 어떻게 포장하면 좋을까, 벚꽃처럼 터지지는 생각들을 오늘은 그냥 두었어. 약을 먹는 나와 약을 안 먹는 나 중 누가 더 나에 가까운 건지 통 헷갈려서 요샌 병원에 가지 않고 있거든. 향기가 너무 좋아서 단지 안에 핀 하얀 꽃 한 송이를 꺾어 손바닥에 놓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 캄캄호의 첫 항해를 <밤과 꽃>이라고 정해버린 건 아보로부터 시작된 거니까. 그래, 거기서부터 풀어가는 게 맞겠다.
하던 일을 접고 ‘캄캄’을 만든다고 했을 때 모두가 비슷한 걸 묻더라. “캄캄에서 뭘 팔 건데?” 나는 대답했지. “뭐든지 팔 수 있어.” 어느 날은 단어를 고르고 골라 ‘신경다양성 브랜드’라고 설명했더니 질문이 다시 돌아왔어. “그럼 신경다양인을 돕기 위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 거야?” 나는 다시 대답했지. “아니 모두를 위한 거야.” 그럼 다시 묻지. “잡지를 책을 팔 거야? 아니면 캠페인용 티셔츠를 팔 거야? 수익은 어떻게 나는 건데?” 그럼 또 대답하지. “음, 하나는 약속할 수 있겠다. 아마 네가 생각하는 그건 절대 아닐 거야. 이미 있는 건 안 팔 생각이거든.” 그럼 다시 묻겠지. “레퍼런스라도 보여줘. 뭘 하려는 건지 이해가 안 돼.” 그럼 또 이렇게 대답하겠지. “레퍼런스는 없어. 왜냐면 세상에 없는 거니까.” 이쯤 되면 열에 아홉은 피곤한 기색을 보일 타이밍이지. “후훗. 그래 여기까지. 이제 그만할게."
꺼내지 못해서 꽁꽁 숨겨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친구들과 함께 있어도 오래 외로웠어. 나는 왜 꼭 다른 생각하는 걸까, 설명은 언제나 이렇게 길게 늘어지나, 좀 더 효율적으로 비용과 시간을 쓸 수는 없나, 기어코 탈진 상태가 될 만큼 나를 완전히 태우는 일은 이젠 그만해야 하는데. 균형 있게 영리하게 효율적으로 일하기, 아니 그보다 평균에 근접한 삶을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족집게 학원이라도 있으면 다시고 싶은 심정이었거든.
그런데 말이야. 마음이 끌리는 일만 좇아 20년을 직업인으로 살다 보니 어렴풋이 알겠더라. 나 같은 사람도 세상에는 존재해야 한다는 걸. 쓸데없는 걸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계속 생각해서 상상하고 펼치고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 보는 사람, 아름다운 것들에 온 마음을 홀랑 빼앗겨 버리는 사람, 먹는 것 잠자는 것도 잊고 한 가지 즐거움에 흠뻑 빠져있는 사람,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을 발견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기어이 드러나게 하는 사람, 그러니까 그 사람 이어야만 하는 일, 그 사람이어서 만들어지는 어떤 세계가 있다는 걸 말이야.
다시 말해서 어떤 미디어 회사의 편집장, 영국에서 공부한 어떤 플로리스트가 아니라 꼭 ‘캄캄’이어야 하고 꼭 ‘아보’ 여야만 하는 일 같은 거 말이야. 지금부터 우리가 하려는 일이 바로 그런 것 이지. 어때, 벌써부터 설레지 않아? 어린 아이처럼 흠뻑 빠져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람을 나는 좋아해. 내게 일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지. 먹고사는 수단이 아니라 그것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결국 하고야 마는 것.
아보, 너라면 나의 이 길고 이상한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이미 이해하고 있을거라고 생각했지.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면 네가 놀라 뒷걸음칠까 봐 못한 이야기가 아직 많지만 그건 차차 하기로 하고. 또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 버렸다. 자, 이제부터는 <밤과 꽃>이라는 수업에 대해 다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2024년 꽃피는 5월,
그랑으로부터
지난 5월 캄캄호의 첫 항해 <밤과 꽃> 프로젝트를 위해 뜻과 마음을 모은 탑승자들과의 일화, 그간의 과정들을 이곳에 기록해 두려고 한다. 이번 가을에는 아보의 농원에서 인터뷰 프로젝트를 진행할 예정이니 우리의 두 번째 이야기를 기대해 봐도 좋겠다. 검은꽃 이미지는 탑승자 모스의 AI 아트워크로 실제 선정되지 못한 작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