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이제 엄마가 없다
내 생일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부고 소식은 카톡으로 받았다. 발신인은 엄마. 외할머니에게는 일곱 남매가 있었지만 노모를 곁에서 돌본 건 큰 딸인 우리 엄마였다. 그러니까 그간 마음고생 몸 고생 제일 많았던 건 누구도 아닌 엄마다. 내가 유치원 다닐 때부터 한 번도 일을 쉰 적이 없던 엄마는 진취적인 사람이었다. 남매를 서울로 대학 보내 놓고는 다시 유아 교육을 공부해 어린이 집을 차리셨다. 그 와중에도 새벽 시장에 나가 가장 싱싱한 생선과 야채를 사고 퇴근길에 들려 할머니의 식사를 챙겼다. 딸 대학 공부시키고 영국에서 공부하고 온 아들 가게 자리 내주느라 부모님의 보금자리는 점점 더 낡고 볼품 없어졌다. 낮에는 어린이집에서 영유아와 어린이를 기르는 원장님, 새벽과 밤에는 외할아버지 먼저 보내고 쇠약해진 90세 노모를 돌보느라 딸, 아들에게는 좀 소홀했음을 엄마는 올해가 되어서야 인정하셨다.
스무 살 넘어 성인이 되면 엄마 도움 없이 사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다. 결혼하고 엄마가 된 친구들이 친정 엄마의 챙김을 받아 반질반질 예쁜 모양일 때마다 내 구멍들이 커져 더 잘 보였다. 내 마음이 그때부터 좀, 아니 많이 뾰족해졌다는 것을 나도 엄마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부모 도움을 기꺼이 받지 못하는 어른 아이는 돌봄을 주는 것도 돌봄을 받는 것에도 익숙하지 않다. 나의 결핍이나 부족함이 혹시 누군가에게 폐가 될까 잔뜩 움츠리며 살았다.
그럼에도 무조건 사랑하는 나의 외할머니. 너는 제일 똑똑하고 예쁜 큰 딸의 첫 딸이라 외손녀 중 네가 최고 제일 이라던 나의 외할머니. 오빠들만 위한다고 서운하다는 울 엄마 마음은 몰라줘도 손녀딸은 어떤 아들보다 낫다고 치켜세우던 외할머니. 홍대 미대 떨어져서 속상한 내 마음은 모른 채, 이화여대 합격한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던 나의 외할머니. 슬프다. 너무 슬프다. 그런 나의 외할머니가 세상에 없어서. 근데 제일 슬픈 사람은 우리 엄마다. 엄마는 이제 엄마가 없다.
이번 추석 요양원으로 뵈러 가려다 길이 막혀 계획을 변경했는데, 오전에 아이들 캠프 보내고 외손녀가 꼭 찾아올 수 있도록 그것도 주말이 시작하는 밤에 눈을 감으셨나 보다. 한동안 뵙지 못해 무뎌진 줄 알았는데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 눈물이 난다. 아이들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의 외할머니는 딸 곁에서 100세까지 건강하게 사셨고 서울에 사는 외손녀 배웅을 받으려고 손녀가 태어난 날 머나먼 나라로 떠나셨다. 그곳에서는 외손녀인 내가 아니라 나의 엄마를 지켜주셨으면 좋겠다.
어린 나의 두 아들은 자기들이 돈을 벌지 못하니 엄마에게 해줄 게 이것밖에 없다며 모래 케이크를 만들어 주었더랬다. 당시 원고 마감을 하던 나의 두 손을 끌고 어서 빨리 나와 보라던 로카와 이도키. 집 앞 놀이터에는 흙과 주변 솔방울을 따다가 정성스럽게 다져 만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 케이크가 있었다. 나의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보내드리기 위해 아이들이 내게 보낸 사랑의 표식들을 사진으로 꺼내 본다. 지독한 우울증을 겪었던 나는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쓴 백세희 작가의 부고 소식을 듣고 내내 검은 마음이었다. 외할머니가 나를 고향으로 부르신다. 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엄마를 잃은 엄마에게 지금 빨리 가보라고 하신다. 너에게는 너를 사랑하는 외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다고. 어서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2025년 10월 17일, 나의 외할머니가 2025년 10월 16일, 백세희 작가가 5명에게 새 생명을 주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나누며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에 대해 알려준 백세희 작가님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그리고 하루의 차이로 돌아가신 나의 사랑하는 외할머니와 마지막 인사를 위해 고향으로 가는 길, 이 글을 씁니다. 혹시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저 역시 오늘의 사랑과 오늘의 아름다움을 붙잡고 겨우 살아가는 중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딸들이 너무 애쓰지 않기를 그저 존재 자체의 귀함을 진심으로 말하고 이해받기를 바랍니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