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침묵이 잠시 공기 속에 머물렀다. 남자와 난 아무 말 없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아픈 건지도 모른다는 남자의 말이 의아해 다시 한번 되묻고 싶었지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에게 다시 묻는 순간 그의 말이 곧 현실이 될 것만 같아 겁이 났다. 지우는 그 사람과 날 번갈아 쳐다보더니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는지 나의 소매를 살짝 집어 잡아당기며 말했다.
"선생님, 저 집에 데려다주실 수 있어요? 밥도 다 먹었고... 아저씨한테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난 지우 손을 잡고 일어서서 그 남자를 매섭게 쏘아보며 말했다.
"앞으론 지우한테 연락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오늘 일은 지우 어머니께 말씀드리지 않을 게요."
지우를 데리고 뒤돌아서 나오는데 그 남자가 내 뒤통수에 대고
"우리 다시 만날 겁니다. 선생님이 절 다시 찾을 거예요."
라고 말했다. 나는 그 남자의 말을 흐르는 물처럼 흘려버렸다. 들렸지만 듣지 않았다. 다시는 그 남자를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기분이 상한 채 지우를 데리고 택시를 탔다. 택시 안에서 난 지우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지우는 내 눈치를 살피다 집으로 가는 내내 창밖만 쳐다보았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그 남자의 얼굴이 창가에 비친다. 잽싸게 지나가는 가로등과 가로수들 사이에도 그 남자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 남자를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머릿속에 억지로 넣으려고 노력하는 새 택시는 지우 네 집 앞에 도착했다. 지우와 헤어진 후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남자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샤워를 했다.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간 것처럼 격렬한 시간이었다. 하루 반나절만 지났을 뿐인데 몸과 마음은 이미 녹초가 돼버렸다. 그 남자와 지우의 만남을 내가 너무 비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본 걸까? 준호라는 남자는 여자 아이를 꾀어내 나쁜 짓을 할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빠와 너무도 닮은 얼굴을 하고 나쁜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왜 자꾸 지우를 만나는 걸까.
"여보세요."
"어머님이 지금 많이 안 좋으세요. 병원으로 좀 오셔야 할 것 같아요."
병원에서 온 전화를 급히 받고 가방을 챙겨서 정신없이 집을 나섰다.
"어머님이 식사를 안 하세요.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드셨어요. 식사와 약 모두 거부하고 계세요."
"왜 그러시는 거죠? 잘 지내고 계셨잖아요. 그런데 왜 갑자기 식사를 안 하시는 거예요?"
의사는 컴퓨터 화면과 진료 기록이 적힌 차트를 번갈아 보더니
"대화도 일체 거부하고 계십니다. 음식을 거부하는 것은 심리적인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심리적인 영향이요?"
"네, 외로움이 크거나 우울증, 불안, 스트레스 등 음식을 거부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다만, 이렇게 연세가 있으신 분이 식사를 거부하게 되면 건강이 안 좋아집니다."
"병원에 계셔서 오히려 더 스트레스를 받는 건가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엄마를 한번 만나볼게요."
의사와 상담을 마치고 엄마를 만나기 위해 병실로 갔다.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는 엄마 얼굴이 평온해 보였다. 나는 의자를 당겨 침대 옆에 앉았다. 곤히 잠든 엄마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얼마 전 봤던 엄마얼굴과 달라진 모습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얼굴에 주름은 밭고랑처럼 깊게 파였고 가죽만 남았던 얼굴 살은 더 말라 보였다. 그리고 툭 튀어나온 광대뼈가 더 도드라져 보였다. 엄마가 아닌 것 같다. 자주 엄마를 보러 오지 못한 게 엄마를 홀로 외로움과 싸우게 방치한 것만 같아 마음이 쓰렸다. 못된 딸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가슴 아파하고 있을 때쯤
스르륵 엄마가 눈을 떴다.
"엄마!"
입을 꾹 담은 엄마는 날 보며 눈에 힘을 주는 모습이 나 그만 집에 갈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엄마, 왜 식사 안 하셔?"
"......"
"이렇게 식사 안 하시면 건강이 나빠진다고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
엄마는 살이 없어 움푹 파인 눈으로 날 보기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엄마 병 다 나으면..."
"집에... 갈래..."
"뭐, 뭐라고?"
엄마가 남은 기력을 쓸어 모아 내게 뱉은 첫마디가 집에 가고 싶다는 거였다.
"집에 가면... 식사... 하실 거야?"
힘 없이 날 바라보던 엄마가 대답 대신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난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래도 엄마를 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하는 게 옳은 건지. 이렇게 계속 식사를 안 드시겠다고 고집을 부리게 되면 엄마의 건강이 안 좋아지는 건 시간문제니 당장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야는 지. 결국 난 엄마와 함께 집으로 가는 쪽을 선택했다.
"엄마, 이제 집에 가자!"
엄마는 또 대답 대신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엄마를 휠체어에 태워 택시 승강장으로 나왔다. 길가에 벚꽃들이 가볍게 날리며 공중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택시 승강장 옆에 벚꽃나무에서 꽃비가 내렸다. 꽃잎 한 장이 엄마 손등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엄마는 조심스럽게 꽃잎을 집어 가만히 바라보았다.
"엄마, 벚꽃이 참 예쁘다. 그렇지?"
엄마는 조용히 고개만 두 번 끄덕이다가 기운이 없는지 이내 꽃잎을 놓치고 꽃잎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마침 택시가 도착했고 우린 택시에 몸을 실었다. 조금 추워 보이는 엄마에게 무릎담요를 덮어드렸다. 엄마는 내 손을 꼭 잡았다. 마르고 거친 엄마의 손엔 온기가 없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엄마 손을 난 꼭 잡았다. 그렇게 말없이 엄마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