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기치 못한 특별한 여행, 환승
인생은 기다림의 연속?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톰 행크스 주연의 '터미널'이라는 영화가 있다. 동유럽의 작은 나라에서 온 주인공이 JFK 공항에 도착하지만 입국 심사대를 빠져나가기 전에 고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일시적으로 국가가 사라져 고국으로 돌아갈 수도 뉴욕에 들어갈 수도 없게 된 상황에 빠진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주인공은 JFK 공항에 머물기로 한다. 그리고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영화다.
기발한 생각으로 출발한 이 영화는 그러나 사실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다. 어느 한 이란인이 프랑스에서 영국행 비행기에 탔으나 기차역에서 여권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프랑스로 되돌려졌고 오갈 데 없던 그는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눌러앉아 1988년부터 2006년까지 공항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이런 걸 보면 정말 현실이 허구보다 더 허구 같다.
영화만큼은 아니지만 우리도 해외여행을 가서 가끔 이런 상황에 처하는 때가 있다. 뭐 하나라도 잘못하면 꼼짝달싹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는 순간 말이다. 언제? 바로 환승구간이다.
여행지를 고른 뒤 비행기 티켓팅을 할 때 필터를 사용한다. 원하는 항공사를 선택하거나 원치 않는 항공사를 제외해보고, 가격을 저렴한 순으로 정렬해보거나 총 비행시간을 따져본다. 출발시간은 괜찮은지도 살펴보고 결제조건을 바꿔보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조건을 거는 것은 바로 '경유'다. 우선 직항으로 살펴보고 위에서 말한 조건에 들어맞는 게 없으면 그다음 경유 1회로 넘어간다. 그래도 없으면 2회로 넘어가겠지. 다행스럽게도 비행기를 2번이나 타면서 목적지까지 간 적은 없다.
만약 그럴 일이 생긴다면? 무지하게 돈이 없거나 시간이 많아졌거나 지구 반대편 오지로 (어쩔 수 없이) 출장을 가는 경우겠지
비행기는 직항이 최고다. 누가 모르겠는가. 인천공항에서 출발해서 해당 국가의 가고자 하는 도시까지 한 번에 날아간다면 그 보다 좋을게 뭐가 있을까?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해도 중간에 다시 비행기를 내렸다가 타는 수고로움과 번거로움이 없으니까. 그리고 나같이 심한 비행 공포증 환자에게 고통 속에 겨우 내린 비행기에 다시 한번 올라타야 하는 것만큼 고문은 없다.
추가로 경유를 하게 된다면 비행기를 한 번 더 타는 고생은 둘째치고 만약 중간에 수화물을 내가 챙겨서 새로운 비행기에 싣어야 한다면 그것만큼 최악의 환승 경험은 또 없을 것이다.
가뜩이나 장시간 비행으로 (대부분의 환승은 장시간 비행을 동반한다) 피곤한데 내 짐부터 찾고 환승시간 내내 캐리어를 힘들게 끌고 다니다가 다시 수화물로 보내고 비행기에 탑승한다? 상상만으로도 벌써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인생 뭐 항상 뜻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 비행기표를 예매(구매)하는 것은 거의 종합 예술에 가깝다. 여행 일정, 시간대, 비용, 항공사 등 여러 가지 요소를 복합적으로 고려한 뒤에야 결제를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직항을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왕왕 벌어진다. 이런 경우 어쩔 수 없이 경유를 선택해야 하는데 경유에도 종류가 있고 그 종류에 따라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달라진다.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 무척이나 짧은 환승 > 런닝맨을 찍자
3~4시간 정도 되는 여유로운 환승 > 지갑을 털리거나 라운지에서 영혼을 털리자
하루 이상 넘어가는 환승 > 모든 걸 포기하고 시내 구경을 하자
경험에 비추어 각각 환승에 대해 말해본다.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어느 공항 어디에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최악의 환승 조건은 정말 다 갖추었다. 한 시간도 되지 않는 환승시간, 생전 처음 도착한 공항, 끝에서 끝으로 이동, 수화물을 찾고 다시 보내야 하는 번거로움까지 종합 선물세트로 경험했다.
너무 급해서 사진조차 남기지 못했다. 나름 비행기표를 예약할 때만 해도 '단 1초의 시간 낭비도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환승이 되겠군'이라고 자만했는데 웬걸, 그 한 시간 동안 정말 지옥을 경험했다. 그 뒤로 다신 한 시간 남짓 경유 표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현실판 터미널의 시작이다. 다음 여행지로 바로 갈 수도 없고 인근 도시로 짧은 여행을 떠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환승구역 내에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정말로 내가 속한 국가가 내전이 벌어지거나(...)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을만한 일이 벌어져서 돌아갈 수도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벌어지면?
첫 유럽여행 때는 비용이 조금 들더라도 직항 편을 이용했다. 환승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괴담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환승을 잘못해서 비행기를 놓쳤다거나 전혀 엉뚱한 곳으로 흘러 들어갔다거나 유럽에 도착해야 할 내 짐이 러시아 어딘가를 떠돈다든가..
하지만 어느 정도 여행이 익숙해지고 나서는 과감하게 환승에 도전했다. 첫 환승은 동유럽 여행을 가기 위해 핀란드 반타 공항에서 프라하 공항으로 가는 여정이었다.
인천을 떠난 비행기는 9시간 반 만에 핀란드 헬싱키 반타 공항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프라하 공항에 가기까지 3시간 정도 환승시간이 남았다. 그 애매한 시간에 걸린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반타 공항 환승구역엔 다음 비행기를 타는 동안 즐길 거리가(지갑을 털릴 기회가) 많다. 온갖 음식점도 쇼핑을 할 수 있는 면세점도 있다. 그리고 북유럽 특유의 분위기를 뿜어내는 소품샵들도 있다. 게다가 반타 공항엔 천하무적 라운지 'almost at home'이 있다.
여러 공항의 라운지를 가봤지만 이 곳만큼 정말 집 이상으로 편한 곳은 본 적이 없다. 북유럽 특유의 깔끔하고 정갈한 디자인에 먼지 한 톨 없을 만큼 정리정돈과 관리가 잘 되어 있다. 이 정도라면 환승 대기시간이 2시간이든 3시간이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번 공항을 이용하고 환승도 경험했지만 단 한 번도 공항 밖으로 빠져나간 적이 없었는데 아이슬란드 여행을 갔을 땐 환승시간이 너무 길다 못해 다음 날로 넘어가버려서 공항 밖에서 1박을 한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이체 로운 경험이었다. transfer로 가는 게 아니라 exit로 빠져나갈 때의 어색함이란..
남들이 환승 여행 환승 여행 부르짖을 때마다 뭐하러 그 짧은 시간에 공항에서 시내로 나가 정신없이 구경하고 다시 공항으로 돌아와서 비행기를 타고 가는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가서 하루 정도 머물 시간을 확보하고 나니 본 잡지(아이슬란드)에 딸린 별책부록(헬싱키)처럼 보너스처럼 헬싱키 시내를 구경했다.
어라, 괜찮은데?
물론 여전히 나에게 직항과 경유를 고르라면 '시간의 여유는 없고 돈의 여유가 있다면' 직항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경유를 선택하라고 하면 대략 2~4시간 정도 되는 경유를 택할 것이다. 한 시간 남짓한 환승시간은 내 영혼을 갉아먹고, 하루가 넘어가는 환승시간은 보너스 같은 관광을 할 수 있지만 시간이 조금 아깝다.
2~4시간 정도 되는 환승은 지갑과 영혼은 털릴지언정 비행기를 갈아타고 잠시 숨을 고를 여유도 확보하고 지갑이 털리면서 생긴 전리품으로 평생 기억에 남길 환승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자, 환승만의 특별한 여행
words&phots by lai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