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리아 Nov 29. 2023

F318과 F412

칠흑 같은 밤

얼마 전, 처방전의 코드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5년 동안 크게 신경 써 본 적 없는 처방전이었다.



어느 여름, 나는 가족들과 이야기 나누는 일이 힘들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가을이 되자 잠들지 못하는 새벽이 찾아왔다.

칠흑 같은 새벽,

눈을 감아도 정신은 너무나 또렷했다.

해가 반짝이는 것만 같은 머릿속에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살아갈 가치가 없어.

뛰어내려. 죽어.'

그가 뛰어내리라고 속삭이는 거실 창으로

달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자살했다는 인터넷 기사의 연예인들이 이랬나 싶었다.

속삭임은 멈출 줄 몰랐고,

내가 이렇게 죽는 건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회사에 다니며 존경하던 멋진 상사가 있었다.

모르는 게 많은 날 곁에 앉혀두고

다정한 선생님처럼 조곤조곤 알려주시던 분.

날이 밝자 전화를 걸었다.

그분은 신경정신과를 무서워하던 내게 용기를 주셨다.

그 힘으로 집을 나섰다.

버스를 타고 논밭 사이 구불구불한 도로를 지나 보건소에 도착했다.

우리 집 근처의 신경정신과 목록을 건넨 담당자는 병원도 추천해 줬다.

내가 가장 편하게 갈 수 있는 곳을 골라 초진을 받았다.




'주부 우울증'입니다.

진단을 마친 의사가 내게 말했다.

진단명이 참 촌스럽다.

주부 우울증이라니...

'주부'라는 단어가 붙어 촌스러워진 우울증을 진단받고 약을 먹기 시작했다.

주부가 아니었다면 신경정신과에 갈 일이 없었을까.

퇴사 서류를 회사에 제출하던 날,

아이들이 내 앞길을 망치는 것만 같았다.

내 인생을 망치려고 아이들이 태어난 것만 같았다.

회사를 탈출하겠다고 임신을 계획했던 나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어느 날은 화내는  보면서 아이가 웃었다.

그 웃음이 나를 놀리고 무시하는 것만 같아

웃지 말라고 악을 썼다.

그렇게 악다구니를 치다가

내 분을 이기지 못해 엉엉 울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내가 도망치면 아이를 돌볼 사람이 없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그랬다.

주부 우울증은 적절한 진단명이었다.




네 살짜리 아이의 엄마가 밉다는 말에 너무 화났다.

내가 너를, 너희를 어떻게 키우고 있는데

내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미움받고 싶지 않아

그저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서

착하다는 말만 듣고 자라온 아이였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온 힘을 다해 키우는 중인 내 아이가 나를 미워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나는 그 말을 그저 아이의 칭얼거림으로 넘길 수 없었다.

상담 선생님은 원가족을 봐야 한다고 얘기했다.

역시나, 내 가족이 문제였다.

우연한 기회에 참여한 집단상담 프로그램.

그곳에서 나는

방 모서리에 간신히 웅크리고 앉은

나의 내면 아이를 만났다.

팔다리도 따로 만들지 않고 한 덩어리 찰흙으로 울퉁불퉁 겨우 욱여넣은 사람의 형체.

나는 끝내 그 아이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다.

그 아이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떨리고 두려웠다.

상담사는 언젠가 내가 이 아이를 만나 마주하고 모든 감정을 꺼내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전 06화 엄마라서 해야 하는 일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