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구구단 못 외워서 나머지 공부하고 집에 갔던 적 있었거든요. 그때 아마 생애 처음으로 나머지 공부를 했는데, 집에 가니까 집이 완전 발칵 뒤집혀져 있는 거예요.
- 왜? 나머지 공부 때문에?
- 네. 집에 제가 늦게 오니까 엄마가 어디 갔다왔냐고 난리가 난 거예요. 나머지 공부하고 왔다니까 엄마가 기가 막혔는지 실소를 터뜨리면서 그랬어요 “너 지금 나머지 공부를 했다는 게 말이 되니? 아니 내가 얘 때문에 동네 챙피해서 어딜 다닐 수가 없어.”
- 엄마가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 네. 우리 엄마는 체면이 제일 중요한 사람이었거든요. 근데 제가 거기다대고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 석고대죄라도 했어?
- 아뇨. 웃으면서 그랬어요 엄마, 뭐 어때
그리고 우리는 같이 웃었다. 지금의 나는 저런 대사를 절대 할 수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
- 너는 좋은 환경에서 걱정 없이 자랐으면 진짜 자유로운 예술가가 됐을 거 같아.
- 그랬을까요?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렸을 때 정말 밑도 끝도 없이 해맑았다. 시험 때문에 공부를 한다는 개념은 아예 없었고, 시험 점수가 50점이 나와도, 60점이 나와도 그게 뭐가 잘못됐는지를 몰랐다. 그 점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엄마의 얼굴이었다. 그 날도 성적이 나온 어느 날이었다. 역시나 올백이 적혀있는 통지표를 가지고 온 언니와 달리 내 통지표의 숫자들은 그 날도 자비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었다. 엄마에게 혼이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해서 지루하기까지 했다. 엄마에게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이 난 뒤 엄마는 나에게 미안했는지 함께 시장에 가자고 했다. 그 시절 엄마와 함께 시장에 간다는 것 아홉 살인 내게 방학만큼이나 반가운 것이었다. 우리 동네는 5일에 한 번 장이 서곤 했는데 그 때마다 찹쌀도넛 할머니가 오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요리를 못했고, 그렇다고 군것질을 넉넉히 할 수 있을만큼 용돈을 주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시장 찹쌀도넛츠 할머니만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하필 성적이 나온 날 엄마를 따라나선 게 화근이었다.
- 그쪽 애는 백점 몇 개 나왔어요? 우리 애는 제일 잘한 게 80점이야.
엄마는 못나온 내 성적을 동네방네 광고라도 할 셈인지 엄청나게 큰 목소리로 상대가 굳이 먼저 묻지도 않은 얘기를 해버리는 것이었다.
- 모르겠어. 아유 이번에 시험이 어려웠는지 우리 애도 잘 못봤더라고. 백점이 두 개던가... 세 개던가..
백점이 세 개나 되는데 시험을 못봤다고? 꼴랑 5과목이 조금 넘는데 말이지. 난 의아했고 저 아줌마가 지금 자랑을 하는 건지 아닌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엄마는 그 아줌마의 앓는소리를 가장한 얄궂은 자랑이 못내 걸렸던지 마지막 일갈을 했다. 그렇게 언니는 항상, 엄마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언니는 끈질겼고 성실했다. 늘 반장이었고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다. 그런 언니에게 익숙해진 엄마에게 나같은 딸은 재앙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공부도 못하고, 특별히 잘하는 것도 없고, 학교에도 흥미가 없고. 엄마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기 위해, 나는 그런 엄마를 이해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다는 사실을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렇게 백점이 있는 자식과 없는 자식으로 엄마들의 세계가 재편된다는 걸, 백점이 없으면 비참해진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내가 백점을 안 맞으면 엄마가 다시는 시장에 가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백점은 없었다. 3학년에 올라가자 성적은 더 떨어졌다. 엄마는 육십몇점이 적힌 시험지를 받아 들고는 어이가 없었는지 허탈하게 웃었다. 그것은 곧 포기였고 체념이었다. 체념이 곧 안정을 의미한다는 건 열 살의 세상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는 4학년이 되었는데, 그때부터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은 성적이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나는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고, 교차되는 두 개의 그래프로 인해 나의 성적은 더 드라마틱하게 여겨졌다. 그때쯤부터 엄마도 학교에 오기 시작했다. 엄마가 담임 선생님에게 인사하고 반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는 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우등생의 참맛을 알 게 된 것 같았다. 성적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선생님도 나에게 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교실을 빗자루로 쓸거나 칠판지우개를 터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이 서류 3반 선생님에게 가져다 드려” 혹은 “아이들 숙제 좀 걷어올래?” 같은 다른 아이들과의 계급을 결정짓는 우등생들만의 특권 같은 심부름을 드디어 나도 하게 된 것이었다. 내가 그 심부름을 하게 되자, 아이들은 어느새 나를 반장 후보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나를 에워싸던 공기의 흐름이 뒤바뀐 느낌이었다. 나는 성적이 조금 올랐을 뿐인데,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나를 다른 모양으로 비추고 있었다. 처음에는 기분이 좋았고, 만족스러웠다. 누군가에게 받는 칭찬이 이렇게 달콤한 것이구나,를 매일 체현하는 나날이었다. 칭찬은 달콤했고, 그만큼 갈증을 불러일으켜서, 더 많은 것들을 갈구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부터는 칭찬을 받기 위해 애쓰는 나날의 연속이었다. 이미 알게 된 이 젖과 꿀이 흐르는 세계를 쉽게 잃을 수는 없었다. 나는 더 노력했고, 가끔은 밤을 새웠고, 누군가에게 완벽해보이기 위해, 누군가 나를 칭찬해 줄 그 말들을 기다리며 하루 종일 나를 괴롭혔다.
그때부터 못하는 것은 절대 하지 않았다. 특히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더 그랬다. 일이나 공부에 관련된 일이 아닌데도, 나는 강박증을 가진 환자처럼, 내가 무언가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모습은 절대 보여주지 않았다. 나는 늘 완벽해야 했고, 능숙해야 했고, 그게 무엇이든 잘해야 했다. 잘하는 것만 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 어쩌면 죽도록 잘하는 것만 하기 위해 애를 써왔다. 잘하는 것도 더 잘하지 못하면 속이 상했다. 내가 이정도 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가장 못 받아들이는 사람은 항상 나였으니까. 그렇게 나의 세계는 점점 비좁아져 가고 있었다. 너는 좋은 환경에서 걱정 없이 자랐으면 진짜 자유로운 예술가가 됐을 거 같아. 자유로운 예술가란 무엇일까. 저 말을 듣고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못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 갑자기 그냥, 이 말이 떠올랐다. 칭찬이 없는 세계에서도 그저 자신만의 것들을 뭉근하게 해 나가는 사람. 내가 못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나에게 중요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못하는 것이 더 이상 내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날들이 올까. 쉽지는 않겠지만 그런 날들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인생은 때로 아무도 박수를 쳐 주지 않는 곳에서도 계속 춤을 춰야 하니까. 칭찬이 없는 세계에서도 춤을 추는 고래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