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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리 Jul 19. 2023

전기가 사라진 그 순간

처음엔 에어컨이 꺼졌다. 더운 나라에서 에어컨이 안된다는 건 청천벽력 같은 일이어서 온갖 난리를 치며 수리기사를 불렀다. 그리고 그날 저녁 집안의 전기가 전부 나갔다. 에어컨이 안될 때보다 더 당황해서 두꺼비집도 올렸다 내렸다 해보고 관리사무소에 뛰어가고 외출한 남편에게 빨리 들어오라고 난리도 치다보다 보니 전기가 들어왔다. 하지만 에어컨이 다시 고장 났다.


결국 관리사무소에서 사람이 오고 나서야 에어컨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고 우리 집뿐만 아니라 우리 층 전체 전기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됐다. 이때부턴 갑자기 불이 꺼져도 그러려니 하고 기다렸다. 전기가 나간 경험이야 당연히 있었지만 이렇게 한번 나가면 15분 정도 그리고 자주 꺼지는 건 처음이었다. 저녁시간에 전기가 안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당황스러웠다.


너무 어두워서 애들이 어디 부딪칠까 봐 신경 쓰는 건 기본이고 물을 마실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정수기는 전기가 없으면 물이 전혀 안 나왔다. 저녁 먹다가 목마르다 하는 아이들에게 물을 줄 수 없을 때의 그 당황스러움이란..  밥 먹고 티브이 대신 노트북으로 만화를 보여주려다가 와이파이가 없으면 인터넷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이틑날까진 우왕좌왕 난리도 아니었다. 티브이 보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애들 달래고 어두운 부엌을 밖의 불빛에 의지해서 치우느라 힘들었다. 그래서 자기 전 책 읽어 달라는 애들에게 어두운 곳에서 책 읽으면 엄마 눈 나빠진다며 거절하고 그림만 후루룩 보여주고 재워버렸다. 불이 다시 켜질 거라는 애들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엄청 섭섭해하면서 자길래 좀 미안하긴 했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삼일째 날, 나와 아이들은 저녁시간의 어두음을 대비하고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미리미리 자기 컵에 물을 가득 담아뒀다. 전기가 나가면 에어컨도 같이 꺼지니깐 얼음을 가득 넣어서. 에어컨이 꺼져도 덥다고 징징거리지도 않고 땀 흘리며 평소처럼 잘 놀았다.

나는 빨래를 미리 다 끝내고 저녁은 치우기 편하도록 간단하게 준비했다. 이게 뭐라고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니 마음이 한껏 여유가 넘쳤다.

저녁을 먹고 나니 본격적으로 전기가 나갔다. 전날보다 훨씬 자주 불이 꺼졌다.


티브이를 보려고 시도했지만 너무 자주 꺼졌다. 그래서 텔레비전이 꺼지면 창 밖의 불빛에 의지해 책을 읽어줬다. 전날에 전혀 안 읽어줘서 미안해서 미리미리 읽어주려 했다. 근데 애들은 이걸 엄청 좋아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밝은 거실 창문옆에서 책을 읽어주겠다 하니 엄청 설레어하며 달려왔다. 아이들은 참 새로운 걸 좋아한다. 결국 티브이는 포기하고 불이 켜질 때마다 재빨리 잘 준비를 했다. 어두우면 양치해 주기도 힘들다.


그러다 이날이 되어서야 휴대폰 손전등 기능이 떠올랐다. 손전등 기능으로 책을 읽어주면 되잖아!!

캄캄한 방에서 손전등 기능을 켠 순간 침대 맞으면 하얀 벽에 아이들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그림자놀이가 시작됐다. 둘째가 벽에 자기의 그림자를 만들자 첫째가 손으로 늑대 모양을 만들어서 그림자를 한입에 삼켜버렸다. 그걸 본 둘째는 한껏 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으아아아 고 도망가는데 정말 웃겼다.


신나게 놀게 하고 애들을 재우면서 뿌듯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애들을 더 행복하게 지내게 할 수 있는데 늘 이렇게 하기가 쉽지가 않다. 뭐 그래도 조금씩 더 잘하는 부모가 되겠지. 그나저나 정전의 밤은 이날로 끝이었다. 불이 안 꺼지니 또 아쉬운 걸 보면 애들만이 아니라 나도 재밌었나 보다.

전기고 뭐고 관리사무소 앞에 왕나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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