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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태리 Oct 08. 2023

한글선생님과 한글날

한국인에게 한글이란 공기와 같아서 소중함을 잘 못 느낄 때가 많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간송문화전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본 순간, 유리 안에서 환하게 빛나던 그 책은 나에게 한글을 특별한 존재로 만들었다. 사실 특별하단 말도 부족하다. 마법 같았다. 오백여 년 전 만들어진 책이 세종대왕님이 한글을 창제하셨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게 했다. '몇 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는'이라는 문장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였다. 한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게,

이건 나의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글을 들려주고 싶게 했고, 더 나아가 내가 경험한 반짝이는 것들을 쓰고 싶게 했다.


그리고 내가 한글 선생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했다.


'한글 선생님'


내가 왜 한글선생님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려면 먼저 한국어 위원회 이야기를 해야 한다.

거창하게 느껴지는 이름인 '한국어 위원회'는 단지 첫째 아이 학교 엄마들 8명의 모임이다.

정말 순수하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려고 모였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한국어와 관련된 회의를 한다 하니 한글을 사랑하는 나는 본능적으로 참석했을 뿐이었다. 한참 회의를 듣고 있으니 결국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게 어떠냐는 이야기였다. 모임을 주최한 언니의 열정적인 모습에 거기에 있던 엄마들이 거의 모두 참여를 하기로 했다.


두 번째 회의땐 발을 잘못 넣은 거 같다는 후회를 살짝 했다. 아무리 내가 한글을 사랑하고 한글을 알리는 걸 좋아하지만 내가 기대했던 수업의 모습과는 확연히 정말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다. 한글을 모르는 아이에게 가나다라를 가르치는 수준을 지나 제대로 된 한국어의 이해와 이를 통한 자신의 의견 전달을 목표로 했다.


몇 번이나 만났는지 모르겠다. 거의 매주 한 번씩 만나 수업의 방향, 수업교재, 반 편성 방법 등을 고민했다. 국제학교에 다니는 한국아이들은 1학년이어도 한글에 능숙한 아이부터 고학년이어도 한글을 읽을 수 없는 아이까지 그 수준이 다양했다. 그래서 수업을 4반이나 만들게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수업료 책정부터 티셔츠구매, 아이들과 진행한 레벨테스트, 학교와의 협의까지 이번학기 시작을 목표로 8명이서 얼마나 열심히 노력을 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처음에 느꼈던 당황스러움은 금방 사라지고 솔직히 재밌었다. 오랜만에 일하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가 싶기도 했지만 그것보단 모두가 적극적이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다 보니 일이 물 흐르듯 진행되는데서 오는 쾌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별로 중요한 일을 하지 않아서 즐거움만 느낀 거 같다. 언니들은 어쩜 그렇게 다 잘하는지 신기하다. 내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야기하고 해결했다. 본격적으로 수업이 시작되기 전 학교 한국어 선생님이 참여하시면서 기대했던 것보다 더욱 안정적인 모습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물론 모든 게 완벽하진 않다. 수업에 집중 못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도 있고, 잘하는 반도 있고, 처음 마음과는 다르게 수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중반을 지난 지금 내가 생각할 때, 우리들도 아이들도 아주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가장 어린 반 보조 선생님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귀염둥이들에게 선생님이라는 소리도 듣고 동요도 실컷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내 두 아이들도 수업을 듣다 보니 굉장히 뿌듯하다.


내가 일을 하나 만들었는데 마음속에 이 언니들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생각이 있었던 거 같다.

학기 초에 학교 도서관에서 한글책 기부를 요청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듣자마자 이건 내가 추진해야겠다 싶었다. 도서관에 책을 기부한다니 딱 내가 해야 할 일 이잖아? 9월에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한글날이라는 단어가 번득이며 떠올랐다. 한글책 기부의 마무리로 한글날 행사를 한다면 좋지 않을까?


나의 이런 생각을 도서관 사서님들과 한국어위원회 언니들이 적극적으로 아주 적극적으로 환영해 준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아주 커졌다.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학교관계자와 한국어머님들을 모시고 행사도 하고 도서관 수업이 있는 아이들에게 한글 관련 액티비티도 진행하기로 했다. 이뿐만 아니라 사서님의 요청으로 도서관을 한글로 꾸미기까지 했다. 심지어 사서님은 한국어 책장을 눈에 띄게 화려하게 꾸며주셨다. 감사할 따름이다.


태풍을 일으킨 작은 날갯짓이라는 언니들의 농담을 들으며, 또 즐겁게 일을 했다. 아주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신나게 하는 언니들을 보니 잘한 일인 거 같다. 아무튼 이번에도 나는 언니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어쩜 그렇게들 생각도 빠르고 손들이 빠른지 내가 뭔가를 하기도 전에 결과물이 나와있었다. 각자 자기가 잘하는걸 다른 사람 기다리지 않고 그냥 바로바로 해왔다. 엄마는 역시 빠르다. 나는 주로 사서님과의 연락과 책기부를 담당했다. 이때다 싶어서 나의 책들도 많이 기부를 했다. 도서관에서 익숙한 책들을 보는 게 기분이 좋다.


드디어 한글날이다. 한글날 행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내가 인사말을 하게 되었다. 준비해 준 모두를 위해서 아주 짧은 인사말이지만 잘 해냈으면 좋겠다. 이번 일이 끝나면 언니들과 편한 마음으로 수다 떠는 시간을 갖고 싶다.




나의 미래는 나의 과거에 영향을 받는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기억이 해외에 살게 된 내가 한글을 알리게 한 것처럼. 지금 내가 경험하는 좋은 기억들이 또 다른 좋은 미래를 가져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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