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올해로 이어지는 한류문화의 화제작 '기생충', 그 기생충의 경쟁작이라는 스페인어 영화 '페인 앤 글로리(Pain & Glory)'를 보았다.
페드로 알모도바르(Pedro Almodovar)의 작은 자서전과도 같은 이 신작은 소소하지만 굵직한 재미를 준다. - 반면 기생충은 '굵직하지만 소소한 재미'를 가졌다고 본다. (말장난이 아님을 밝혀두고..)
'페인 앤 글로리'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이야기한다는 면에서 '기생충'과는 화각이 전혀 다르지만 두 영화 공히 찌릿한 통각을 준다. - 거듭 말하지만, 통각의 넓이와 깊이가 다르다. 그러니 한 영화제에서 '기생충'이 최고상을 받든 '알모도바르'가 최고상을 받든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개인적으로야, 개인적인 이야기인 '페인 앤 글로리'가 더 좋다. 그건 그렇고,
두 편의 영화를, 영화가 아니라 희곡이라고 봐 버리면 기생충 쪽이 조금 더 읽는 맛이 있다.
"너는 계획이라는 게 다 있구나."
송강호의 이 카피는 유행처럼 번졌다. 심지어 오랜만에 찾아뵌 점잖은 한 선배께서는 정색한 채 나를 다그치는 와중에도 '진현이는 계획이라는 게 다 있구나'라고 하시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랬다. 내 수중에는 늘
계획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하루마다의 계획을 세워본다. 가령,
'오늘은 재즈를 듣고 싶단 말이야, 출근길엔 '오부리' 천지인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의 빌리지 뱅가드를 들을 거야'라든가, '점심땐 기타나 기타 앰프, 또 페달을 리뷰하는 유튜브를 볼 거야'라든가... 오늘은 찻집에서 책을 읽을 테야, 저녁 무렵엔 중앙시장에 자전거를 타고 가서 닭강정을 사 올 테야, 심야의 라디오를 들을 거야, 더 심야엔 재즈스러운 톤으로 기타를 쳐야지 등등.
맞다, 계획대로 되는 건 거의 없다. 계획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계획을 알면서도 계획 따라 움직이지 않을 때가 많다.
계획 따위, 될 대로 돼버려라.
하지만 계획은, 계획 그 자체로 설렌다.
그러니 계획하기를 즐겨보는 건 어떨까.
나도 잘 못 느끼고 있었지만... 어느 날 보니 문득, 나는 일상의 단위마다 계획을 즐기고 있었다.
A를 만나면 이 말을 해주어야지. 아침 7시쯤 반신욕을 해야지. 내일은 선물 받은 그 향수를 뿌려야지. 오랜만에 9선을 타고 출근할 거야......
계획을 만들다 보면 계획대로 되는 경우도 많아진다.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계획을 즐기고 있다."
2월까지는 열심히 일하자고. 스스로 만족할 정도로 열심히. 그리고선
아내에겐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남쪽으로 가자, 그래서는, 봄을 품고 조금씩 올라오는 거다. 봄이 더디면 변산반도에서 동해안으로 버스를 타고 가로질러도 보고, 새벽에 일어나서 일출을 바라보며 자판기 믹스커피를 뽑아 마시자. 부산에 사는 친구는 만나고 온 건가, 친구를 만나고 고향에 들른다. 봄이 발밑에 와 있다 여보, 사흘 뒤쯤 봄과 함께 집 현관으로 들어설 거야.
역시, 계획이란 대단히 재미있는 일종의 취미활동이다.
여행 계획 같은 신나는 계획이 아니더라도 즐길 만한 계획은 많다. 다이어트를 위한 운동 계획, 비즈니스를 위한 책 선물 계획,-누군가 받아 들고 좋아할 책을 고르는 시간은 정말 행복한 순간-맡은 일을 몇 시간 후부터 하겠다는 계획도......
* 본 글은 코로나가 우리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획은 세우고 즐길 필요가 있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