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에서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 본 건 처음이었는데 이 경로의 버스를 내 평생 다시는 타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던 것 같다. 창 밖의 풍경은 무슨 이유인지 선명했고 유독 지금까지도 기억이 난다. 포항에는 전근대적인 건물들이 띄엄띄엄 있었고 거대한 아파트의 꼭대기엔 아파트의 이름을 라인별로 한 자 한자 검정 페인트로 한 자 한자 써 놓았다. 포항으로부터 격리된 느낌만 가득했다. 포항에 다시 올 일이 있을까, 하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워크맨으로 CD나 실컷 들어야지 생각하면서 대구 동부정류장에 내려 88라이트를 피워 물었다. 포항여자와의 연애는 실패한다는 내 선입견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아무튼 94년의 1학기는 포항여자가 시간을 지배했음이 틀림없다.
기주와 함께 들었던 사학과의 수업도 그렇다. 나는 온갖 질문과 학생들 발표에 대한 힐난 섞인 지적을 했던 것 같다. 마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타과에 가서 날뛰었던 것 같다. 그 수업은 고대사 수업이었고 고대사 학계에서 권위 있는 소장파 교수가 수업을 진행했다. 그 교수의 이름이 ‘중’ 자 ‘국’ 자여서 아직까지 나는 교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교수는 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나의 태도를 달가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교한 연구를 주특기로 하는 교수는, 나의 상상에 근거한 질문들이 좀 따분했을 것이다. 철학도의 엉터리에 가까운 관점도 썩 내키지는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학점도 좋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수업을 그 아이와 내가 같이 들었고 무려 같은 그룹이 되어서 발표준비도 같이 하지 않았냐고, 기주가 말해주었지만 지금까지도 내게는 한 번의 답사만이 짙게 남아있다. 그날은 봄기운이 가득했다. 우리가 어떻게 이동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운문사 근처의 나무 그늘 속에서 도시락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 기주는 흔한 김밥이 아닌 유부초밥을 싸왔다. 직접 싸왔다고 했다. 그 맛은 기억나지 않지만 멋진 모양만큼 맛있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온 수업이어서 교수도 목소리에 즐거운 흥분이 묻어있었다. 밥을 다 먹고 교수의 주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교수가 운문사가 지어진 당시의 역사를 설명하기 시작했을 때 나와 그 아이가 주위를 둘러보다 눈길이 마주쳤고 서로를 향해 앞서거니 뒤서거니 살짝 웃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