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매우 어정쩡해서 커트 코베인과 몹시 대비적이다. 내가 자란 환경은 안정적이고 또 촌구석도 도시도 아닌 어중간한 곳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는데 역시 고위직도 아니고 심하게 하급 공무원도 아니었다. 어머니도 그렇다. 나의 외갓집은 면사무소 옆의 사진관이었다. 특별한 예술가의 집안은 의당 아니었고,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림을 아주 잘 그리신다. 어머니의 그림은, 예술가들 말고는 대부분 칭찬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다. 물론 그림의 의도보다는 기술적인 것에 대해서 말이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조금 특별했지만 대학은 역시 어정쩡했다. 들어간 시기부터 그랬다. 학교는 축제의 뒤끝처럼 취기에서 조금 깨어나고 있었다. 80년대를 진하게 휘감고 난 후 버려진 광장은 광장이었기 때문에 펼쳐져 있다는 식이었다. 교수와의 상견례에 간 74년생들이 보통은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까 싶은데… 학과장 딱 한 명의 교수와 인사를 나눴다. 내가 선택한 전공만큼은 어정쩡하지 않았다.
나는 철학을 전공했다. 1학년 1학기에 나는 그리스문화사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리스문화에 관한 책들은 90년대에는 거의 출판되지 않았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은 관련도서들은 대부분 70년대의 저작을 재출판한 80년대의 저작들이었다. ‘그리스 문화와 철학의 조응’은 내가 대학에서 최초로 제출한 리포트의 제목이었다. 아마 나는 ‘키토’의 책을 참고하지 않았을까 싶다. 철학은 어정쩡하지 않았지만 국문학을 부전공으로 채택하면서 뭔가 어정쩡해졌다. 93년 여름 방학 때 나는, 무작정 국문과의 가장 존경받는 교수의 방을 찾아갔다. 문학을 배우고 싶다고 다짜고짜 말했다. 아름다운 여교수는 놀란 눈으로 나를 한참이나 쳐다봤다. 교수는 고전시가 전공자였지만 그 여름에 나는 국문과의 석사과정 등 몇몇과 함께 국문학이 아닌 영미시를 읽고 요약하고 강론을 들었다. 그 자리에 지금은 유명한 소설가 아니 영화프로그램 진행자로 더 유명한 사람이 학생으로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사람은 유명한 영화평론가 옆에 앉아서 리듬섹션을 담당한다. 지금도 TV에 그 사람이 나오면 돌려버린다. 왠지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