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하는 예쁜 마음이 담긴 말인 줄 알면서도 때로는 그 말이 참 서운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고통스러울 때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할 때. 아니 너무 지쳐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때.
퇴사를 결정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한 대학 동기 동생 C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학원강사를 하던 또 다른 동기 녀석 J가 다른 학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간이 좀 났으니 함께 놀러 가자는 이야기였다. 마침 나도 퇴사를 한 터라 같이 놀러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동기 동생이 있는 진해였다. 경상남도에서도 가장 남쪽, 바로 바다가 접해있는 동네였다.
여행 첫날, 아침 일찍 J가 나를 데리러 차를 끌고 왔다. 예전에는 여행을 갈 때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만났었는데 J가 차를 끌고 오니 새삼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대중교통을 타고 다니다가 이제는 자가용을 타고 만나니 세월이 그만큼 많이 흘렀다는 걸 체감하게 되었다고 할까. 묘하게 뽐내는 J를 보고 있으니 '역시 자본주의는 돈을 잘 버는 게 최고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차가 있으니 좋은 점이 많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지금 나에겐 차를 살 마음도 살 돈도 없었다. 서울에 살면서 그리고 서울을 빠져나가면서 다시 한번 느낀 교통지옥은 차를 사고 싶지 않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기도 했다. ‘굳이 필요 없다.’
우리는 진해에 가기 전에 통영에 하루 들러서 놀기로 했다. 통영은 대학생 때 내일로 여행으로 한 번 가본 게 전부였다. J는 통영이 처음이라고 했다. 우리 중에서 가장 돈을 잘 벌고 있긴 하지만 그만큼 자기 시간이 없는 J였다. 우리는 여느 여행자들의 여행 코스처럼 동피랑에 들러 짜장면을 먹고 사진을 찍고 루지를 타고 케이블카를 탔다. 나는 여행을 즐기기보다는 J에게 가이드를 해주고 있었다. 폭염주의보가 내린 통영의 여름에 지쳐갈 때 우리는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하기로 했다. 저녁을 먹기 전까지 잠시 쉬기로 했는데 그때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김민성 씨죠?”
“네 맞는데요.”
“네 여기는 목포 괜찮아마을입니다. 괜찮아마을 1기 입주민으로 선정되셔서 연락드렸어요.”
“아, 네. 감사합니다.”
괜찮아마을… 대표에게 퇴사하겠다고 말하고 집에 와서 3시간 만에 작성해서 냈던 괜찮아마을 지원서 그리고 면접의 결과가 나왔다. 참 극적이다고 생각했다. 퇴사를 말했던 그 날은 공교롭게도 괜찮아마을의 지원 마감일이었으니까. 사실 어디론가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고 싶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에 지쳐 머리가 무거워졌을 때 페이스북 광고를 보고 알게 되었던 괜찮아마을, 그리고 서울 설명회까지도 뭔가 모를 끌림에 다녀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뽑아줘서 감사하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사실 뭔가 막 엄청 끌리는 건 아니었다. 여행도 즐겁지 않고, 새로운 기회도 그냥 무감각했다. J에게 괜찮아마을이라는 거에 선발되었다고 알려줬다. 6주 동안 목포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더니 J는 얼굴이 흐려졌다. 그렇게 우리는 어색한 시간 어색한 대화를 이어가며 저녁을 먹었고 길거리를 산책하다가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객실에서 쉬다가 만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심심하셨는지 우리에게 이런저런 말을 건네셨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호구조사를 하기 시작했고 우리가 퇴사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얘기하자 인생의 훈계 같은걸 하기 시작하셨다. 처음에는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처럼 이야기하다가 젊은 사람들이 끈기가 부족하다고, 자기 세대는 열심히 일해서 바꿔왔다는 식의 전형적인 이야기를 꺼내셨다. 여행을 와서도 뭐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나 싶기도 했는데 적절히 끊어낼 말을 찾지 못해서 또 그걸 듣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듣다가 나도 발끈했는지 젊은 사람들도 다 이유가 있어서 일을 그만두고 또 일을 골라 가는 것이라고, 그리고 젊은 세대는 힘이 없으니 윗세대가 잘해야 세상이 바뀔 수 있다고 뭐 그런 식으로 얘기를 하고 마무리했다.
분명 여행을 왔는데 마음이 놓이지도 않았고 편하지도 않았다. 상황은 하나같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자다깨다를 반복하고 그다음 날,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소매물도로 갔다. 몇 년 전 내일로 기차여행을 하다가 가지 못해 아쉬움이 남았던 섬이었다. 당시 태풍이 불었었는데 내가 탔던 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취소가 되었었다. 배가 전복될 법한 풍랑을 뚫고 배가 소매물도까지 갔었는데 섬에 내리면 그 후로 언제 나오게 될지 몰라서 나는 그 배를 타고 다시 육지로 돌아왔었다. 그리고 태풍으로 뱃값도 환불받았었다. 강렬하고 별난 경험이었기는 하지만 그때와 비교했을 때 소매물도로 가는 뱃길은 너무나도 잠잠하고 평온했다. 마치 나에게 길을 열어주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소매물도에 도착해서 높은 언덕을 끊임없이 올랐다. 걷다 쉬기를 반복하고 연신 땀을 닦아내면서 우리는 산 정상에 올랐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수평선이 보이는 뻥 뚫린 풍경, 망망대해 위 외롭고 작은 섬 소매물도. 아름다운 풍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에게는 외로움과 두려운 마음이 차올랐다. 아마도 나는 섬의 풍경에 ‘나’를 투영해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소매물도가 유명한 건 비단 아름다운 풍경 때문만이 아니다. 물 때에 따라 연결되는 길이 있다는 점이다. J와 나는 바닷가에 앉아서 그 길이 열릴 때까지 기다렸다. 거짓말처럼 길이 연결되고 우리는 옆에 붙어있는 섬으로 향했다. 이 섬의 길은 그래도 옆 섬보다는 완만하고 높이도 조금 낮아서 걸어 다닐 만 했다. 천천히 섬을 둘러본 후 등대 옆 그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햇살은 여전히 뜨거웠다. J와 나는 섬을 충분히 둘러본 후, 돌아가는 배를 기다리기 위해 왔던 길을 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높은 언덕을 오를 생각을 하니 벌써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갈 수밖에.
우리는 부두 위 카페에서 잠시 쉬었다가 소매물도를 나왔다. 점심을 먹고 C를 만나러 진해로 향했다. 새로운 경험도 추가되고 뭔가 교훈이 될 것 같은 장면들이 내 앞을 스쳐 갔다. 예전에는 머리가 가벼워지거나 아무 생각이 없어지곤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달랐다. 조금도 변화되지 않는 무거운 마음 그리고 복잡한 머리는 ‘내가 왜 이럴까?’ 자문하게 했다.
다시 먼 길을 달려 진해에 있는 C의 집에 도착했다. 공기업에 다니는 C는 우리 중에 제일 먼저 결혼을 했다. 고맙게도 C의 부인 분이 친구들과 여행을 가서 자리를 비켜줬다. 지방이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꽤 큰 평수의 신혼집, 알콩달콩 잘 꾸며놓은 모습을 보니 살짝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결혼은 너무나 먼일이었다. 돈도 사람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의지도 없었다. 의지는 있었는데 상황이 욕구마저도 거세시킨 걸까. 열심히 빚을 갚고 있다고 얘기하는 친구의 말을 들으니 과연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거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모습으로 살기 위해 우리는 지금을 보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어떤 행복을 좇고 싶은지.
C가 추천한 횟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C는 맨날 하루하루가 똑같다고 했다. 적당히 일하다가 적당히 동료들과의 관계를 잘 이어나가며 승진을 노린다고 했다. J는 좀 더 많은 돈을 주는 학원으로 옮기기 위해 면접을 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제 내 차례가 되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어. 그냥 대기업 가. 아니면 그냥 공무원 준비하는 게 어때?”
“프리랜서로 살려면 정말 치열하게 열심히 해야 해. 남들보다 늦은 건 사실이잖아.”
“다 형을 위해서 하는 소리야.”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전달되어 무척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이 부정당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고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 상황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차피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과 기준은 다른 것인데 그래도 오랫동안 나를 지켜봐 온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이다 보니 그냥 흘려들을 수만은 없었다. 그들이 살아온 방식이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그들 스스로 이룩해낸 정답이었고 또 나는 현재 이렇다 할 정답을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성공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의 정도로 귀결된다. 돈을 얼마나 벌어놓았는지, 앞으로 얼마나 더 벌 수 있는지, 어디에 투자해야 얼마를 더 벌 수 있는지만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은 아직도 방황을 거듭하고 있는 내가 답답했나 보다. 얼마를 벌기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나에게 이제는 그냥 적당히 벌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남들처럼 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의견을 반박하고 보란 듯이 나만의 방식으로 성공해내겠다는 불꽃은 타오르지 않았다. 나에게는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표정이 어두워졌고 갈 곳을 잃은 나의 시선은 허공을 떠돌았다. 그렇게 한바탕 나에게 집중되었던 순간이 지나갔고 C와 J는 요즘 벌이가 어떤지 재테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은지 등등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주고받았다.
워터파크를 가기로 한 다음 날 아침, 망가진 마음은 몸에도 영향을 주었다. 배탈에 열까지 나서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그래도 아쉬우니 약을 먹고 예정대로 워터파크에 가서 나름 재미있게 놀았다. 파도 풀과 워터슬라이드 여러 개를 번갈아 가면서 타고 놀았다. 그러나 나는 그저 친구들이 기분이 나쁘지 않을 정도로만 맞춰서 표정을 짓고 놀이기구를 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오후가 되자 비가 내렸고 내 컨디션도 점점 더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는 못 놀겠다고 간신히 말을 뱉었다.
불편한 마음 한가득 안고 돌아온 서울. 자취방에 누워서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좀처럼 기분이 나지지 않는 상태가 너무나 불안했다. 퇴사하기 전부터 찾아온 이 이상한 불안은 퇴사한 후에도, 여행을 다녀온 후에도 전혀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이 무기력은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끝이 없는 터널, 점차 깊어지는 동굴로 빨려 들어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퇴사를 고민하기 전, 조금씩 복잡해지던 내 마음의 끝을 보기 위해 마음과 관련된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했던 게 도움이 됐다. 나도 우울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터넷에서 간이 테스트를 찾아서 해보았다.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회복 탄력성(회복 탄력성 :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되 튀어 오르는 비인지 능력 혹은 마음의 근력을 의미)이 한국인 평균보다 높았던 나의 심리상태는 우울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의사에게 진료 혹은 상담 치료를 받아보라는 권유와 함께.
예약된 시간에 맞추어 병원으로 갔다. 집 근처에 정신과 의원이 생겼던 것, 그리고 그걸 지나치지 않고 기억했던 것들이 참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멀리 있었으면 아마 가기 싫었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였으니까. 진료 전, 간단한 종이 검사지를 받아 해당하는 답에 체크하고 점수를 더했다. 병원에 가기 전 인터넷에서 했던 간단한 우울증 테스트와 비슷했다. 그 후, 별도의 검사실로 가 양 손목과 한쪽 발목에 집게를 달고 3분 동안 내 신체의 신호를 검사했다. 옆에 놓여있던 인바디 측정기를 한 후 검사를 마무리했다. 잠시 기다리다가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 선생님을 만났다.
왜 이 병원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의 변화를 겪었는지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내 감정의 상황에 관해 얘기했다. 살면서 마주했던 우울의 감정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 회복되지 않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했던 경험, 중학교 때의 괴롭힘과 사춘기, 고등학교 졸업식 때 맛봤던 좌절감과 재수를 통한 변화, 대학교 때 느꼈던 공허함. 취업 준비, 방황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요약해서 얘기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처음 정신과 상담을 받을 때는 다들 눈물을 흘린다고 했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앞에 있던 티슈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느꼈던 건 2주 전, 대표의 앞에서 퇴사를 얘기하며 터져 나오던 감정만큼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힘들었겠다고 공감해주셨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내 상태에 대해 진단해주셨다. 다른 건 괜찮은 편인데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이 깨져있다고 했다. 원래는 5:5의 비율로 나타나야 하는데 거의 9:1 정도로 교감신경이 우세했다. 몹시 긴장되어 있고 위축되어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게 계속되면 다른 지표들 즉 내 건강한 부분들도 문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요즘 소화계통이 좋지 않았나 보다. 의사 선생님은 나에게 약물치료를 권했다. ‘브린텔릭스’ 라는 약을 쓸 것이고 약물치료를 시작하면 장기간 복용하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서 신중하게 결정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다음 주부터 6주 동안 목포에서 사는 프로그램에 선발되었다고 얘기했다. 그래서 이 약물을 지금 바로 복용하는 걸 결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갈지 말지 고민만 가득해 머리가 아팠던 상황이었다. 의사 선생님께 지금 상태로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괜찮을지 여쭤보았다. 의사 선생님은 내 자아가 꽤 강한 편이기에 좋은 기회인 것 같다고, 참여해도 될 것 같다고 얘기하셨다. 만약 내 자아가 그 정도가 아니었다면 가지 말라고 말렸을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상담이 마무리될 때쯤 나는 내 진단명을 물어보았다. “우울증. 옛날 학명으로 하면 기분 부전이에요. 남들보다 조금 에너지가 떨어지는 내향적인 그런 거죠.” 자신의 우울증 상담 골을 에세이로 낸 책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떠올랐다. 이 책을 쓴 작가 백세희 씨도 기분 부전 장애였다. 이 책을 읽었기 때문에 나는 내 우울함에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확정을 받으니 뭔가 공식 인증을 받은 느낌이었다. 감정이라는 바닥에 구멍을 뚫고 또 뚫어서 나는 정말 진짜 바닥을 경험하게 되었구나. 확답을 받았으니 끝인 것 같지만 이제부터가 정말 시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물러설 곳도 떨어질 곳도 없는 그런 느낌.
단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 그 누구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 목포에 가는 기차표를 예매했다. 캐리어에 짐을 싸면서도 정말 가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한 걸음 한걸음이 두렵고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만큼 나는 스스로 무너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