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자크 라캉은 욕구, 요구, 욕망을 구분해서 말했다. 개략적으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욕구(Need)는 "밥 먹고 싶다"와 같은 1차적인 충동, 요구(Demand)는 "밥 줘"와 같이 욕구를 만족시켜 달라는 표현, 욕망(Desire)은 욕구와 요구의 격차로 생겨나는 감정.
자본주의가 욕망으로 들끓는 이유를 한번 라캉식으로 생각해 보자. 먼저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는 광고와 콘텐츠가 넘쳐난다. 한 사람에게 하루에 노출되는 광고의 숫자는 무려 4,000 ~10,000개다(Jon Simpson, "Finding Brand Success in the Digital World", Forbes, 20170825).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것을 요구할 돈과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욕구와 요구의 격차가 5G의 속도로 커진다. 욕망이 폭발하게 돼버리는 것이다.
SNS만 봐도 얼마나 많은 욕구가 생기는가? "저 사람처럼 발리 여행 가고 싶다" "나도 시그니엘 호텔에서 호캉스 하고 싶다" "래퍼들처럼 롤렉스 시계 차고 싶다" 등등. 로건 유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Compare & Despair(비교하고 절망하기)"를 끊임없이 하게 된다. 이렇게 욕구는 무한대로 커지는데 우리의 통장잔고는 0으로 수렴하곤 한다. 앞서 말한 대로 욕구와 요구의 비대칭으로 욕망만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말한 대로 '무소유'를 실천하면 욕구 자체가 최소화되기 때문에 그에 따라 요구와 욕망도 최소화되겠지만, 속세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때 샀던 티셔츠를 대학교 때도 그대로 입을 정도로 크게 물욕이 없던 사람이었다(중3 때 키가 멈춘 것도 큰 도움이 되었겠지만). 큰 결핍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에 이런 기질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나에게도 취직 후 억누르기 힘든 욕망이 생겼다. 바로 '손목시계'였다.
손목시계의 경우 싼 것은 1만 원도 안 하지만 비싼 것은 10억 원도 훌쩍 넘는다. 갖고 있는 돈과 원하는 시계에 따라 욕망이 엄청나게 커질 수도 있는 영역인 것이다.
손목시계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은 단계별로 시계를 구매하곤 한다. 대학생 때는 100만 원 이하의 시계, 사회초년생 때는 100만 원에서 500만 원 사이 시계, 그리고 결혼할 때 즈음에는 1,000만 원 전후의 시계와 같이 말이다.
사진 출처: 조선일보
그런데 이렇게 단계별로 시계를 살 경우의 문제는 욕망이 해소되기보다는 지연된다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욕망이 증폭된다. 나의 욕구에 맞는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를 할인해서 요구를 하기에 구매를 하더라도 욕망은 여전히 남아있고 때로는 시계를 사기 전보다 더 커진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시계보다 훨씬 저렴한 시계를 사다 보니 사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욕망이 생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래퍼 더콰이엇이 한 말에서.
더 콰이엇. 사진 출처: 유튜브 'Baverse Studio'
그는 사고 싶은 것이 생겼을 때 기왕이면 가장 비싸거나 좋은 것을 사려고 한다는 맥락의 말을 했다(정확한 말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래야만 물욕이 깔끔하게 사라진다는 이유를 덧붙이면서.
대부분 다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사고 싶은 물건의 가격이 부담돼서 그보다 저렴한 것을 사면 높은 확률로 후회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내 손에 쥐어진 저려미 버전(?)을 볼 때마다 원래 사고 싶은 물건이 더더욱 눈에 아른거리는 그런 상황 말이다. 욕망이 사라지기는커녕 더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더 콰이엇의 말처럼 무엇인가를 너무나 사고 싶고 반드시 사야만 한다면 다소 부담이 되더라도 원래 갖고 싶었던 가장 좋은 것을 사는 것이 확률적으로 낫다. 나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가장 사고 싶은 가격대의 시계를 구매했고 손목시계에 대한 욕망은 사라졌다. 2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이 선택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더 이상 시계에 대한 생각으로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가 원하는 가장 비싸고 좋은 것으로만 살 수는 없다. 집과 차만 생각해봐도 무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가능한 분에게는 질투와 박수를 같이 드린다.)
그래서 내가 찾은 또 다른 방법은 탐욕의 크기를 터무니없이 크게 키우는 것이다. 무소유를 추구할 수 없다면 무한대의 소유를 상상해보는 것이다. 극과 극은 맞닿는다고 이렇게 탐욕의 크기를 터무니없이 키우고 나서는 오히려 전체적인 욕구가 줄어들었다. 대부분의 물건과 서비스가 시시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탐욕의 크기가 커지다 보니 사소한 돈문제에도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1조 원을 욕망하는 사람에게 눈앞의 100만 원은 가져도 그만 갖지 않아도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탐욕의 크기를 키우고 나서는 더 많은 사람에게 베풀게 되었다. 기부를 더 많이 하는 것은 물론이고.
물론 지금까지 말한 바는 지극히 개인적인 방법이다.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는 생각이자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일 수 있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유하는 이유가 있다. 욕구가 무한대로 커지는데 비해 요구할 수 있는 것은 0으로 수렴하는 욕망의 시대를 각자의 방법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바가 터무니없다고 느낀다면 여러분이 조금 더 보편적이고 타당한 방법을 찾아서 공유해주었으면 한다. 진심으로 알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