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여러분도 남을 대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이요 예언서입니다. (마태복음 7:12)
예수의 이 언명이 기독교 윤리의 근본 원리라 불리는 황금률(Golden Rule)이다.
그런데 조철수 작가의 <예수 평전>에 따르면 예수 이전에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었다. "너에게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마라"라고 말한 유대교의 율법학자 힐렐이다. 이른바 '힐렐의 언명'이라고 불리는 말이다. 공자가 말한 서(恕)도 힐렐의 언명과 같은 맥락에서 타인을 배려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긍정문이냐 부정문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성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동일하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고,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마라
언뜻 보면 이보다 완벽한 말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나는 남이 아니고 남은 내가 아니다. 즉 내가 원하는 것과 남이 원하는 것, 그리고 내가 싫어하는 것과 남이 싫어하는 것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극단적으로는 내가 원하는 것을남이 싫어할 수 있으며,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이 좋아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나의 도움이 타인에게는 불편한 오지랖 심하면 폭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황금률에만 의지해서는 이러한 오해와 그로 인한 문제를 피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황금률에 두 가지를 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역지사지'와 '선의'다.
1. 역지사지
주는 사람은 '역지사지'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역지사지는 말 그대로 타인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 기준에서 좋고 싫음을 판단하기보다는 타인의 기준에서 좋고 싫음을 판단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생활의 기본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가치를 전달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야만 한다. 회사 내에서는 상사와 후배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야만 상대가 원하는 가치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나와있는 수많은 '마케팅' '세일즈' 서적들은 바로 이 역지사지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가를 말하는 일종의 방법론적인 이야기라고도 볼 수 있다.
100%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역지사지를 타인을 대하는 기본값으로 두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필수라고 생각한다.
2. 선의
받는 사람은 주는 사람의 '선의'를 믿어야 한다. 장기적인 관계에서 상대의 모든 것을 선의로 보지 않는다면 사회생활은 지옥이 될 수밖에 없다. 쓴소리도 결국 나를 잘되게 하기 위한 상대의 선의로 보아야 주어지는 모든 도움을 온전히 받을 수 있다.
"나를 속이려 하는 사기꾼도 선의로 받아들이라는 거냐?"라고 반문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모든 상황에 선의를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대로 장기적으로 관계를 가져가는 대상에 대해서 일단 선의를 가져야 한다고 단서를 두었다. 그리고 선의를 갖고 대했는데 상대방이 악의로 보답한다면 아래의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위대한 선지자들이 말한 '황금률'은 대단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황금률이라는 바탕이 있었기에 이러한 미미한 보완책을 그나마 생각해 낼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보완책조차 부족하다고 느끼는 분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만큼 인간관계라는 것에는 명확한 하나의 답이 없다.
'황금률+역지사지+선의'에 더할 것이 있거나 뺄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나에게 조언을 해주면 고마울 것 같다. 역지사지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