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뇌를 자극해보자
아, 그 뭐였지? 하아 생각이 안 나네, 무슨 '영'자가 들어가는 단어였는데.
출산 후 여성의 삶에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한없이 많겠지만, 일찍이 엄마가 된 친구들의 경고 중 가장 등골이 오싹했던 것은 안 그래도 없는 가슴이 아스팔트 도로 위의 껌딱지처럼 된다는 사실과 뇌기능이 서서히 도 아니고 단 번에 저하된다는 것이었다.
며칠간 사라졌던 리모컨을 냉동실에서 찾았다거나, 카페에서 음료가 준비되면 빨간 불과 함께 울리는 진동벨이 가방 속에 있었다거나 하는 에피소드는 친구들로부터 종종 들어본 이야기였다. 최근 들었던 신박한(!) 에피소드는, 아들 둘을 키우고 있는 한 지인이 큐브라떼를 마시려고 얼려둔 커피를 우유에 부었는데 알고 보니 한우장조림 라떼를 만들어버렸다고!
치매도 아니고 30대, 늦어야 40대에 자꾸 잊어버리는 게 많아지고 단어도 생각이 안 난다니.
그때만 해도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지만, 듣던 대로 출산 후 나는 가슴뿐 아니라 어휘 능력도 아스팔트 도로 위의 껌딱지 같이 '무'는 아니지만 딱히 '유'도 아닌 상태가 되었다.
출산 전의 나를 아는 사람이 '그 전에도 특별히 총명하진 않았어'라고 말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어쨌거나 일상에서 쓰는 기초 단어마저 생각이 안 날 때면 가끔 머리를 쥐어박고 싶다. 쥐어박아서 떠오른다면 나는 몇 번이고 망치를 두드려 맞는 두더지가 될 의향이 있다. 말하고 싶은 단어가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아 그 단어를 에둘러 설명해야 하는 상황의 나는 정말 멍충이가 된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생각했던 단어가 입에서는 다른 말로 뱉어질 때, 그 난데없음에 어이가 없어진다.
이를테면 어제 오후의 일이다. 아이와 차를 타고 가는 중, 아이 쪽으로 직사광선이 비치길래 햇빛 가리개를 건네주면서 튀어나온 말, '이걸로 문을 닫아봐'. 분명 내가 의도한 말은 '이걸로 가려봐' 였는데 머리에서 입으로 옮겨지는 프로세싱이 가끔 고장이 나는 모양이다.
언젠가 치매를 예방하는 데 글쓰기가 도움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떤 복지관은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글쓰기 프로그램도 진행한다고 한다. 치매는 아니지만, 잃어버린 어휘를 더 이상 놓치지 않기 위해, 또 흐리멍덩해진 사고가 더 느슨해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쓰다 보면 최소한 현상 유지는 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글쓰기라는 '딴짓'으로 얻는 기쁨이 육아하는 나의 '본캐'를 더 힘내서 살게 만들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글을 써야겠다 마음먹었다고 술술 풀리지는 않는다. 아기가 낮잠 자는 귀한 시간에 짬 내어 쓴다는 게 고작 똥인지 오줌인지 배설물 같이 느껴질 때는, '이렇게 자존감의 바닥을 보느니 외면하고 살지'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배설물 마저 내가 들여다 봐주지 않으면 내 속에 자리한 응어리는 무엇으로 변할지 모른다. 형체를 알 수 없고 크기가 짐작이 안 가는 응어리 일지라도 그대로 두면 혹이 될지 종양이 될지 모르지만, 끄집어 내주면 나를 살리는 무언가가 된다.
치매 예방 글쓰기 교실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쓴 시를 몇 개 읽어 봤다. 그중 임일순 할머니의 시는 꼭 내가 글쓰기가 막막해질 때 드는 마음의 소리를 활자로 적어놓은 듯했다. 한편 싫은 건 싫다고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거침없는 매력이 있었다.
또 중촌마을의 정을순 할머니는, 이런 시를 썼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면서, 무심하게 지나쳤던 나의 마음 구석을 '다시 보기' 할 수 있었다. 어디서 툭- 하고 튀어나올지 모를 두더지처럼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나의 생경한 모습을 마주할 때도 있었다. 왜 어떤 날은 별 일 없이 친구를 만나고 왔는데 며칠이 지나도록 찜찜한 마음을 거둘 수 없었는지, 왜 설거지를 하다 애먼 남편에게 울화통이 치밀었는지, 왜 아이를 재우다가 한없이 눈물이 나왔는지.
단어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건 여전하지만 그래도 말보다 글이 고마운 점은 시간차를 두고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나의 생활 언어는 만 2세가 이해하는 수준에 맞춰져 있지만, 지나온 경험과 감정에 이름을 붙여 주면서 나 자신에 대해서만큼은 더 또렷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