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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 Oct 16. 2021

주부 열등감

"하쿠나, 사람들이 궁금해해서 그러는데, 네가 하는 일이 정확히 뭐야?"


터키로 이민 온 후 우리 집에서 무려 3개월째 일하는 베이비 시터가 물었다. 노트북을 늘 끼고 살고, 뭔가 대단히 바빠 보이긴 하는데 사실 자기도 명확히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으니 에둘러하는 질문이었다.


"음... 나 지금은 아무 일도 없어."


눈치챘겠지만 방점은 '지금은'에 있었다. 원래는 엄청나게 중요한 일과 육아를 병행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잠시 쉬어 가는 중이라는 뉘앙스를 건네고 싶었던 거다.


'나 주부지, 몰랐어?'라고 왜 쿨하게 말하지 못했던 걸까? 아니, 말하기 싫었던 걸까?


그제야 나에게 주부 열등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업 육아맘 혹은 전업 주부라는 말보다는 '육아를 하면서 온라인 사업을 하고 있다'는 걸 늘 강조한다. 구매대행 사업도 하고 있고 (이번 달엔 주문이 두 건 밖에 안 들어왔지만), 수익형 블로그도 키우고 있고 (정작 일기 밖에 쓴 게 없지만), 게스트하우스 사업을 염두에 두고 유튜브도 하고 있다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생각난다. 아직 큰 수익은 없지만, 아무튼 나는 ‘본캐’인 주부보다 ‘부캐’인 온라인 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더 당당하게 알렸다.


주부가 어때서? 집에서 육아하는 게 어때서? 나는 사회 재생산에 엄청나게 기여하고 있다고!


머리로는 생각한다. 나의 생활에 자긍심을 갖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체로 잠시 뿐이었다.


오랫동안 사회적으로 세뇌된, 생산직이 재생산 직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내 잠재의식은 뛰어넘지 못했다. 한 아이를 키우는 일이 가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지만, 어쨌든 살림 노동자에게 돌아오는 보상이 없는 건 참 맥 빠지는 일이니까.


육아와 살림은 무급노동이지만, 내가 그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를 고용해야 할 일이다. 터키에 와서 베이비시터에게 6시간의 대가를 지불하듯 말이다. 육아와 살림을 맡음으로써 지출 비용을 아껴주니 나는 돈을 벌어오는 게 이론적으로는 맞다. 하지만 내 통장에 찍히는 돈이 없다 보니 자신감과 자존감이 떨어졌고, 결국 경제적 자립이 절실해졌다. 그래서인지 나는 3년이 지나도록 ‘주부’라는 옷을 기어코 입고 싶지 않았나 보다.




주부 열등감은 여러 상황에서 발현된다. 또한 어느 쪽에서 튕겨 나올지 예측 불가능한 스쿼시 공 같아서 내 마음은 무방비했다. 미혼 또는 무자녀 기혼 친구들이 나를 빼고 1박 모임을 추진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귀여운 수준. 카펫 구경을 하다 비싼 금액에 흠칫 놀라니, “네 남편에게 사달라고 해봐.”라는 말에 가슴에서 뜨거운 불이 올라온 순간. 우리 부부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남편에게만 무슨 일을 하냐고 묻고 나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때 느낀 쌉쌀한 기분. 브런치 프로필 작성 시 직업 선택란에 '주부'가 없다는 걸 알고는, 주부 작가들이 연대해서 들고일어나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울화도 치밀었다 (지금은 추가되었는지 모르겠다, 바뀌었길 바란다).


어떤 이들은 내 중심을 단단하게 세우고, 다른 이들의 말과 판단은 우아하게 무시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내공이 없다. 베이비시터가 나를 '주부라면서 애는 나한테 맡겨 놓고 집안 꼴은 왜 저래? 맨날 컴퓨터만 하고 앉았네.'라고 생각하든 말든, (물론, 전적으로 이 말풍선은 나의 망상일 뿐)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되는 데 말이다.


역시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나와 가장 가까이 있다. 지나친 생각과 자기 검열.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나의 목소리와 선택에서 멀어져 타인의 소리와 영향력을 중심으로 나의 반응과 감정을 조절하는 것. 이 습관에 빠지면 나의 생각과 의견을 늘상 다른 누군가의 잣대로 재게 된다. 


이 글을 쓰면서도, 화가 잔뜩 난 아기 엄마로 보이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겹치는 걸 보니 역시 나는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내가 좀 더 자유로워지길 바란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직접 돈을 벌든 벌어주든, 내가 나인 것이 편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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