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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 Oct 19. 2021

디지털 노마드 이민의 시작

터키 이민 전의 삶

남편의 시점

"이번 달은 80만 원도 안 들어올 것 같은데"


2020년 12월. 코로나19 3차 유행이 시작되면서 수도권에 학원 집합 금지 행정명령이 떨어졌다. 수업을 진행한 횟수만큼 월급을 받는 남편에게 3주간 학원 집합 금지 명령은 생활비 수급에 비상등이 켜진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당장 구멍 날 생활이 걱정되기보다 아기가 있는 우리 집을 코로나 청정지역으로 유지하는 게 더 급한 마음이었다.



3주는 금방 지나갔고, 거리두기 2.5단계는 그 후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대치동 부모들이 언제까지 아이들을 학원에 안 보낼 수 있을까 싶었다. 온라인 수업을 해볼까 하고 학원에 의견을 냈지만 의외로 학원 쪽에서는 반응이 뜨뜻 미지근했다. 학원 선생에게 학생들을 빼앗길까 봐 그래서였을까. 어쨌든, 온라인 수업을 하게 되면 더 이상 학원이라는 물리적 공간이 필요 없게 돼버리니까.



학부모들의 초조한 마음과 남편의 학원 설득이 엇끼어 남편은 점차 아이들을 비대면으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만 결국 남편은 학원을 통해 가르치던 학생들을 모두 개인 과외로 돌렸고 월급은 학원 소속일 때 보다 1.5배를 벌게 되었다.


남편은 이제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디지털노마드가 된 것이다.  


10년 간 해외에 살다 아이 탄생과 함께 한국에서 1년 반을 살아 본 남편은, 슬슬 콧바람이 쐬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든든한 장치가 생겼으니 그에게는 날개가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시각, 아내의 시점

코로나 3차 유행이 시작하던 2020년 12월.


출산 후 1년 간 재취업에 도전했지만 단 한 군데에서도 최종 합격되지 못했다. 코로나 3단계 발령으로 학원 문이 닫히자 학원 교사인 남편도 이렇게 자연스럽게 백수가 되는 건가 싶었다. 한 지붕 (아이까지) 세 백수라니.


국제개발 협력 분야에서 10년 정도 일했다. 마지막 경력은 외국에 있는 여성인권 단체였다. 쟁쟁한 외국인 동료들 사이에서 유일한 한국인은 나 하나. 이 정도면 내 나름의 성취를 이룬 거라 생각했다. 한국에서 마음만 먹으면 재취업에 금세 성공할 줄 알았다. 자만했던 것이다.


육아에 사이드 잡까지 병행했기에 원 없이 지원서를 넣지는 못했지만 내 경력에 한참 못 미치는 주니어 자리에서부터, 지원 자격이 마치 나의 경험을 그대로 나열한 듯 나에게 딱 맞아 보였던 자리, 조금 벅차 보이지만 경력 10년 차쯤에서 도전해 볼 법한 자리까지 골고루, 성실하게 지원했다.


하지만 철저히 결과로만 봤을 때 어느 곳에서도 나를 불러주지 않았다. 이력서에서부터 '광탈'한 곳도 수없이 많았고 6개월을 기다려 최종 면접까지 봤지만 대기자 중 하나 (대기 1번도 아니고 대기 N번이라는 게 가장 충격이 컸다, 대학 입학도 아니고)라는 발표를 듣기도 했다. 1년의 재취업 기간 동안 가장 공을 들이고 간절히 원했던 자리였는데 ‘대기 N 번자’ 라는 소리를 듣고는 마침내 뒤늦은 '현타'가 왔다.


'나도 '경단녀'가 된 거구나.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어쩌면 성장드라마 같은, 조금은 낯 간지러울 수 있는 스토리 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천직을 찾고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에 대한 낭만이 컸다.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 한편, 남들이 모두 가는 길은 왠지 가지 싫어하는 삐딱함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선진국이 아닌 제3 국에 유학을 두 번 씩이나 떠나진 않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 나를 대학교 친구들은 자라나는 꿈나무라 불렀고, 조금 더 커서는 '욕망녀' 라고도 불렸다.



이토록 '내 일'과 '나의 길'이 중요했던 나는 결혼 후 출산을 하더라도 일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쩌다 '경단녀'가 되어보니, 어쩌다 전업 육아맘으로 살다 보니 그간 오전 시간 카페에서, 백화점에서, 공원에서 봐왔던 전업맘(으로 보이는 사람들)들이 처음부터 전업맘이고 싶어서 아이들을 키우게 된 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한숨 쉬듯  들이지 않고 나온  질문은  모질었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지만 외면할  없었고, 씨감자 줄기처럼 수많은 꼬리 질문들을 끌고 나왔다.



"나는 누구인가. 뭘 좋아하고 뭘 잘하는 사람인가. 지난 10년은 경력이 아니라 그냥 버틴 것 아닐까. 하지만 이제 와서 경력을 버리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이 정도 안됐으면 나는 여기까지라는 말 아닐까. 미련해 보여도 계속 도전해야 하나. 그동안 경력 공백은 계속 길어질 텐 데. 이렇게 자연스럽게 살림과 육아만이 나의 일이 되는 건가."



한편, 위와 다른 결의 생각도 점점 세를 넓히기 시작했다.


"어쩌면 반복된 낙방은 내가 못난 사람이라는 게 아니라, 신이 보내는 신호일지도 몰라. 지뢰밭길이 펼쳐져 있으니 눈길도 주지 말라고 막아 준 거라구. 설렁설렁 하던 온라인 부업을 올인 해볼 기회야. 남편도 당분간 학원을 쉬게 되었으니 여유 있을 때 노를 저어 보자고."


그렇지 않아도 뒤숭숭해지는 연말,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모범 답안을 찾느라 나의 생각은 쉴 틈이 없었다. 그즈음 남편은 회사를 벗어나 잠재적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고 우리 집 전세 만기는 4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방향에 대한 정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가 왔다는 걸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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