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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 Oct 13. 2021

2년 전 면접관에게 하지 못한 말

나에게만 들릴 목소리일지라도

출산 후 6개월이 지나고부터 취업 서류를 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나의 경력을 살려 비영리 기구 (NGO)에 지원했었는데 그중에는 국제 아동 구호단체들도 몇 있었다. 서류 상 내가 아기 엄마라는 걸 알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면접 질문에 넌지시 아이 여부를 알아보는, 아니 답하면서 내가 자녀가 있음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질문이 들어왔다.


곧이어 예외 없이, 면접 끝날 즈음에 '아이가 있는데 해외출장이 가능하겠느냐'는 질문을 했다. 아동 구호 단체이지 여성인권 단체는 아니지만, 의아했고 서운했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여아는 학교 갈 시간에 물을 길으러 간다거나, (생리대가 구하기 어려워서) 생리 중에 몇 주 씩 수업에 빠진다거나 하는 여러 가지 이유로 교육에 뒤처져 있다. 상대적으로 교육을 덜 받은 여아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러 사회,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여성의 고정된 역할 (가사노동 등)로 인해 부모는 젊은 여성의 교육에 시간과 자원을 투자하기보다는 일찍 결혼을 시킨다. 그렇게 악순환은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


국내, 해외를 가리지 않고 거의 대부분의 아동 구호단체는 이러한 서사로 여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아가 여성인권을 말한다. 결국 방점은 여아, 여성에게 편견 없이, 차별 없이 사회, 문화적 관습을 넘어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말 아닐까? 그런데 '아이 때문에 해외 출장 가능하겠냐'는 질문이라니.




그날 바로 이불 킥을 했어야 했다. 면접관의 면전에다 대고 '여아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엄마들의 기회는 뿌리 채 뽑는 겁니까?!' 거센 항의를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날 저녁, 집에 들어와서는 어울리지도, 더 이상 몸에 맞지도 않는 정장을 휘휘 벗어던지면서 '어휴, 또 한 고비 겨우 넘겼네' 하고는 아이를 재우다 아이보다 먼저 곯아떨어졌다.  

기분은 찜찜했지만, 면접관들이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사실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아동 구호 NGO는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해외출장이 잦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기도 하고 중요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한 번 출장을 가면 한 달에서 몇 달씩 지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어린데 몇 달씩 떨어져도 되겠느냐는 질문은 누가 하지 않아도 면접 보기 전에 내가 스스로 했을 질문이다. 게다가 10년 가까이 경력이 있다면 그들이 나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할지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렵게 최종 면접까지 와서 받는 그 질문에 '아, 죄송하지만 생각해보니 아이가 있어서 출장은 어렵겠네요.'라는 답을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떤 답변을 받길 기대하고 그 질문을 했을까? 우리는 분명히 면접 때 확실히 물어봤다는 걸,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라는 으름장 같은 질문이었을까? 불합격 사유를 만들어 놓고자 심어둔 장치 같은 질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여성인권 감수성이 매우 모자란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었던 걸까.  


어떤 단체는 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을 것 마냥 '파견도 가능하세요?'라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싶었던 건 결국, 엄마 손이 많이 필요한 아이를 두고 조직에 충성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돌려 말한 것일 테지. 그 질문에 나는 '육아는 저와 남편이 함께 하는 거라 생각해서요. 만약 제가 파견을 가기로 결정한다면, 남편이 저를 충분히 서포트하기로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마스크에 가려진 그들의 표정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어서 그들이 예상했던 답변이었는지, 원치 않던 답변이었는지 낌새를 차릴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이불 킥 하게 만드는 게 한 가지 더 있다. 면접 후 나오는 길, 어느 단체의 인력 채용 담당자가 '혹시 오늘 면접을 진행하면서 불편한 게 있으셨다거나, 이런 질문은 부당하다거나 의견이 있으시면 저에게 메일로 의견 남겨주세요.'라는 말을 했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채용과정이 완료된 후에 보내주셔도 된다 라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채용이 결정되기도 전에 나를 뽑아줄 수도 있는 단체에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할 테니.


여성 지원자에게 차별적 질문을 한 것에 대해 반드시 한마디 남기리라!


라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의견을 보내지 않았다. 잃을 것도 하나 없으면서 그래도 두려운 마음이 있었나 보다. 내가 언젠가 다시 이곳에 지원할 수도 있는데,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이 업계는 좁은데. 한편으로는 그런 질문을 했던 게, 이해가 전혀 안 가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왜 내가 더 노골적으로 언짢아하지 않았는지, 이메일로라도 내 기분이 몹시 상했다고 짚어주지 않았는지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아빠' 였어도, 같은 질문을 했을까? ‘아기가 어린데 아내가 출장 가면 싫어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으려나. 아기 엄마일수록 더욱더 집을 떠나고 싶단 말이다! (아, 이건 아니지)




엄마들에게 세상은   너그러워진  알았다. 하지만 면접에서 체감한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고 부당함 앞에 당당히 맞서기에 나는 일자리가 고팠고, 출산  재취업의 벽은 크고 넓고 높게 느껴졌다. 아기 엄마에게는 빈틈없이 돌아갈 톱니를 채우기 위한 단기 계약직이나 적당한 부업거리는   있지만, 남성 지원자, 미혼자 혹은 돌봄의 의무가 없는 - 그러니까 시간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비교적 자유로운 - 사람만큼의 자리는 내주지 않는구나 싶었다.


그때 찌푸린 얼굴을 해서라도 언짢음을 표시하지 못하고선 1년 하고도 10개월이 지나서야, 그들은 읽지도 않을 브런치 글로 나의 울분을 토해내고 있다니. 과거에 뜨거울 수도, 차가울 수도 없었던 내가 지금에 와서야 온도를 올려 보지만 내 생각을 뒤늦게나마 적어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게 영 마뜩잖다. 그래도 목소리를 내는 건 한 가지 방법만 있는 것은 아니니 이렇게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나 자신에게만 들릴 속삭임일 지라도 소심한 불만을 쏘아 올리며, 나에게는 내 목소리를 찾아가고 있음에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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