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리로 승진한 나는 소위 핵심 인재들만 모인다는 “본부”로 진출하게 되었다. 결혼을 한 여직원은 일단 퇴사 후 재 입사를 해서 촉탁직으로 근무해야 했던 인사 제도가 없어진 것이 불과 몇 년 전이었던 그 때는 근 100명이 근무하는 “본부”에 여직원이라고는 통역역 두 명, 비서직 한 명, 그 외 나와 같은 일반직이 고작 두세 명 정도 였던 시대였다. 출산 후 복직한 지 얼마되지 않은 부족해 마지않는 여식이 대리 승진에 심지어 쟁쟁한 경쟁(?)을 뚫고 본부 발령까지 받은 데 감읍하셨던 내 부모님은 떡까지 돌리라며 회사로 가지고 오셨다. 직원들은 이 뜬금없는 떡을 새로 발령받은 여직원의 전입 뇌물 쯤으로 여겼겠지만.
화이트 셔츠의 기라성같은 남직원들이 ‘워드 프로세스’를 두들기며 문서를 작성하는 모습은 대학에서 방학 때 타자 수강을 하며 ‘오피스 레이디’(오피스 레이디란 말 자체가 여성비하적인 용어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를 꿈꿨던 나에게 그 충격은 마치 구한말 한양에 올라와 전차를 처음 본 시골 촌부의 그것과도 맞먹을 정도였었다고 장담한다. ‘워드 프로세싱’ 과 해외 각지에 흩어져있는 지점들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전문들(그 당시에는 인터넷 환경이 없었으므로, Telex를 통해 회사 업무들이 오가고 있었다)로 쉴 새 없이 바쁜 동료들 사이에서 나도 어서 빨리 저들처럼 바빠지고 싶다고 간절히 바랬던 것 같다. 나보다 육 개월 미리 와 있던 덕에 MS워드라는 신 문물을 먼저 익힌 ‘팀 선배’라는 자는 대소문자 변환과 각종 기능 키의 역할을 하루에 한 두개씩 감질나게 전수해 주었고, 나는 업무 자체를 익히는 것보다 워드 프로세싱으로 문서를 빨리 작성하는 보조 업무에 더 심혈을 기울이며 하루하루를 바삐(?) 보냈다.
본부에는 본부장 이하 부서장, 팀장, 그룹장 그리고 대학, 부서, 전임 등의 각종 선배라는 이름을 가진 층층 시하의 고 직급자들이 갖은 회의와 접견 그리고 격려와 팀웍 제고의 목적으로 회식을 소집하고는 했다. 수 십년 동안 회식 문화는 많은 변화를 맞이했지만, 2025년인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독보적인 메뉴가 있으니, 그것은 단연코 삼겹살이 아닐까 싶다. 간혹 치맥이나 탕수육과 군만두에 자리를 양보하긴 했지만, 전 부서가 단합 대회삼아 단체 행사를 했던 토요일 저녁에도, 야근 후 삼삼 오오가 모인 어느 일상의 저녁에도 항상 소주를 곁들인 삼겹살이 자리를 빛내곤 했으니 말이다. 졸업, 입사, 결혼, 출산을 매년 한 건씩 해치우고 ‘본부’에 올라온 나는 이미 생후 6개월 아기의 '애엄마'였는데, 미리 공지가 된 팀 회식날이건 갑자기 당일에 잡혀버린 소모임이 생길 때마다 ‘울 엄마 찬스’를 써야 했었다. 회식의 단골 메뉴 삼겹살 만큼이나, 직장을 다니는 워킹맘의 단골 도우미가 바로 ‘엄마’인 것은 지금도 여전한 것 같다. 지금은 직업 도우미의 도움을 받기도 쉽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시설들도 운영되고 있어, 보다 전문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지만,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워킹맘들에게도 어디선가 누군가에(내 자식들에) 무슨 일이 생기면 나타나 뿌려주는 이 극성맞은 엄마찬스는 여전히 절대적인 도움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엄마의 가정과 내 가정의 희생을 전제로 한 전투와도 같은 회식을 치룬 다음 날에도 나는 알량한 ‘워드 프로세싱’에 몹시 바쁘곤 했는데, 그 이유는 신문물에 적응을 거부하고 중지 하나로 자판 세 개를 동시에 누르곤 하는 신공을 자랑하던 일부 선배들(요새는 ‘꼰대’라는 귀여운 애칭이 붙은)과 아마 지금도 그렇겠지만 문서는 도장을 찍기 위해 보는 것(읽는 것도 아니고)이라는 생각을 가진 보직자들 때문이었다. 바야흐로 전입 6개월만에야 그리도 선망해 마지 않던 ‘바쁜 직원’이 되었다는 것은 온갖 문서 작성 기능과 데이터 집계와 분석, 프레젠테이션 기능까지 탑재하고 입사를 하는 21세기의 신입 직원들이라면 이해가 안 될 모습일 것 같다.
아침에 까페에 들러 아이스커피를 한 잔씩 텀블러에 담아 출근하는 지금의 직장인들에게 또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그 당시의 커피 문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전입 수 천재적(?)으로 탑재한 ‘워드 프로세싱’과 함께 나의 존재를 더욱 빛나게 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셋의 다방 커피 제조 솜씨였다. 지금처럼 실용적인 카페 문화가 없던 그 시절 예쁘장한 유리병 세 개에 커피, 프림, 설탕을 담아두고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 마시고는 했는데, 회의가 있거나 외부 손님이 오시는 때에는 나는 어느새 자의 반 타의반 ‘미스 임’으로 변신해 있곤 했다. 여직원이 커피를 타는 분위기는 그 당시에도 상당히 구시대적으로 느껴져 대부분의 남직원들은 자신이 주재하는 회의나 소모임에서는 주도적으로 커피를 타기도 했지만, 아까 말한 중지로 자판 세 개를 동시에 누르는 선배들과 보직자들은 이 때에도 ‘커피 세 잔만 부탁해도 될까?’라며 철판을 얼굴에 까는 모습을 늠름하게 선보이곤 했다. 똑같은 직종으로 입사해 커피나 타라고 대학나온 줄 아느냐고 울고불고하던 시대도 이미 지났던 때였지만, 그 때 이미 ‘꼰대’와 ‘임원’의 경계에 진도가 가까이 가 있던 일부는 ‘고추달린 놈이 부엌에 들락거리는 것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못본다’는 고향에 계신 엄니의 만수무강을 위해서라도 여전히 탕비실에 들어오는 것을 극도의 불효로 여겼던 듯 하다.
나는 그들의 간절하고 뜬금없이 애처로운 눈빛이야 얼마든지 개무시해 줄 수 있었지만, 외부에서 회사를 방문하신 손님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어서 본부 전입 후 본의아니게 습득한 커피 둘, 프림 둘, 설탕 셋 기술을 씩씩하게 선보이곤 했었다.
회사를 위한 나의 기꺼운 마음도 모른 채 “미스 림은 일만 잘하는게 아니라 커피도 잘 타. 어디서 배웠어?” 라며 칭찬을 주는 것인지 망신을 주는 것인지 본인도 애매했을 법한 말씀으로 나를 부들거리게 했던 그 팀장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실까? 사내 녀석 못지않게(?) 똑똑한 딸냄이 자랑이 늘어지곤 하셨었는데, 그 분의 기대대로라면 그 따님도 꽤 유능한 사회인이 되어 있을 것 같다. 스무살도 더 어린 직원에게 직급대신 “미스 림~”(나는 임씬데, 커피를 부탁할 때면 꼭 "림"으로 발음했던!)이라고 불렀던 그 부장님도 직장생활하며 하루를 48시간처럼 살고 있는 자신의 딸을 위해 저녁에는 손주도 봐주시고, 딸의 승진을 바라며 떡까진 아니더라도 간절한 기도도 매일 하고 계시지 않을까?
미스 림으로 불려짐에 대한 앙심으로 그 분의 금지옥엽 따님이 사무실에서 커피 심부름과 함께 ’미스 X’로 불리며 능력을 낭비하기를 바란 적은 한번도 없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거나, 인과응보 같은 논리로 그 시절 미개함으로 선대가 저지른 실수나 업보가 후대에 영향을 끼치길 바라기 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기는 마음으로 이 세상은 조금씩 느리더라도 더 나아지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고 또 믿었으니까 말이다. 물론, 발전하는 사회의 모습이 뭔지를 알았던 대부분의 "남자 동료"들과 설탕 양 조절까지 가능하도록 과학의 원리가 숨어있는 "커피믹스"를 개발해 커피 맛의 표준화를 이룩한 모 커피회사에도 심심한 감사의 마음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