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민 Oct 09. 2024

어려운 대인관계에 관한 진실

‘좋은 사람’은 환상이고 ‘내 사람’은 망상이다

 누구나 대인관계로 인해 고통받는 시기가 있다. 큰 상처를 받거나 주변 사람들에게 연달아 실망하게 되면 깊은 회의감을 느끼게 된다. 배려는 배신으로 돌아오고 이해가 오해로 변질되는 과정은 고통스럽다. 가까운 사이에서 느끼는 거리감은 남보다 훨씬 더 멀다.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고심하는 외로운 날들이 계속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때 대인관계의 본질에 대해 고민한다. 혼란 속에서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고 조용하게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이 과정을 통해 관계가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내면이 건강한 사람은 본인의 행실과 언행을 주로 돌아본다. 남이 나에게 던진 말이나 상처받은 장면을 복기하면서 감정의 되새김질을 반복하지 않는다. 현명한 이들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이 내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대인관계에서 위기를 감지하면 자신과의 관계를 제일 먼저 점검한다. 미움이나 갈등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온다. 내가 나를 미워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존감은 바닥을 칠 수밖에 없다.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남도 사랑할 수 없다. 원만한 인간관계는 자신을 성찰하고 존중하는 태도에서 형성되는 것이다.


 인류애의 시작은 자기애다. 나를 아끼고 사랑해 줘야 남과 잘 지낼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러한 관계의 본질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성찰하지 않는다. 거울은 수시로 들여다보지만 내면을 들여다볼 용기는 없다. 겉모습을 가꾸는 열정의 반의 반만 써도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나를 돌아보는 것보다 남을 탓하는 게 훨씬 더 쉽다. 그래서 남에게 비난을 쉽게 남발하는 인간일수록 크고 작은 대인관계의 문제로 늘 고민한다. 항상 문제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는다. 현실을 직시할 생각은 없다. 자기합리화하기 좋은 내용을 담은 강연이나 책을 자주 찾아본다. 관상이나 사주 같은 운명론에 집착하기도 한다.


 인간관계는 쌍방과실이자 유유상종이다. 원인을 찾으려면 나와 남을 동시에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노력하지 않는다. 반성하고 고찰하는 성찰 대신에 쉬운 답을 선택한다. 그들은 주변 사람들 중에 ‘나쁜 사람들’을 규정하고 낙인을 찍는다. 악인이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받아서 내 삶이 불행해졌다고 여긴다. 하지만 관계는 합의를 통해 성립된다. 지금까지 쭉 어울려다니다 뒤늦게 선을 긋고 본인을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연극은 설득력이 없다. 순수한 어린양은 교활한 늑대와 친구가 될 일이 없다. 늑대의 친구는 늑대나 이리 혹은 여우다. 이제 와서 양의 탈을 쓴다고 피 묻은 이빨과 발톱을 숨길 수는 없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낙인을 찍은 주변 사람들은 사실 나의 거울이자 내 반쪽이다. 그들이 곧 나다. 허물이 허물을 부르고 때 묻은 인간들끼리 무리를 형성한다. 내 몸에 들러붙는 때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상대방 얼굴에 묻은 티끌을 보고 알 수 있을 뿐이다. 대인관계는 늘 유유상종이다. 이 사실을 어렴풋하게 인지하는 순간이 바로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다. 그러나 반성하기 싫어서 기회를 허비한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주변 사람 몇 명을 멸시하면서 잘라내는 선택을 한다. 그것이 내가 나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보다 쉽다.


 여기까지 발을 들인 사람들은 거의 십중팔구 ‘좋은 사람’이라는 환상에 집착한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면 주변에 훌륭한 사람들만 곁에 둘 수 있다고 믿는다. 언뜻 보면 성찰 같지만 본질은 남 탓이다. 좋은 사람이나 완벽한 사람은 없다. 인간은 누구나 크기만 다를 뿐 티끌을 달고 산다. 노력하면서 성취하고 반성하면서 성장한다. 예외는 없다.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때 묻은 자신의 과거를 세탁하려는 초라한 합리화에 불과하다. 좋은 사람에 대한 환상은 잘난 인맥을 만들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연고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잘난 사람들과 어울리면 나도 잘난 사람이 된다는 얄팍한 꼼수는 대부분 실패한다.


 같이 어울려 논다고 해서 그릇의 크기까지 바뀌는 일은 없다.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운운하는 이들은 꼭 ‘내 사람’을 챙기자는 말을 덧붙인다. 내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선택받은 존재다. 그들은 곁에 둘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고, 내 편의를 봐주고, 내게 이익이 되고, 살면서 쭉 써먹을 수 있는 존재다.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평범한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수 없다. 인간관계를 포장하고 있는 미사여구를 벗겨내면 초라한 진실이 나타난다. 이런 마음가짐을 갖고 있다면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다. 사람을 도구로 여기는 인간은 인간성이 결여된 존재일 뿐이다.


 좋은 사람과 내 사람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시기는 인간관계에 관한 가치관이 나뉘는 분기점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잘 드러난다. 잘못을 반성하고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사람은 정말 좋은 사람이 된다. 그들은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지 않고 차별 없이 대한다. 이익이 되는 인맥을 늘리려고 집착하지 않는다. 사람의 머리수를 수익으로 계산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관계에 관해 자주 성찰한다. 내 사람과 남을 구분하는 대신에 누구를 만나든 좋은 점과 배울 점을 찾는다. 좋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다.

이전 26화 초연결사회의 비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