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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하연 Oct 05. 2023

나를 바라보는 '눈'

중국을 바라보는 세종의 시선

‘중간만 하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엄마가 자주 하던 말이었다. 공부 하나에 몰두하지 말고, 젊을 때부터 좋아하는 일을 찾아보라는 좋은 조언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인 나는 정말 공부를 중간만 했다. 고등학교 때가지 나는 항상 중간이었고, 대학교를 가도 평점 3.5를 유지했다. 덕분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빨리 찾을 수 있었지만, 반대로 공부에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 모습에 스스로 화가 나기도 했다. 회사에 취업지원서를 넣었을 때 가장 큰 빛(?)을 발했는데, 수상경력을 묻는 질문에 장려상을 적는 건 내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상을 탄 것 자체가 중요하지 않느냐고 했다. 그러나 1등이 되고 싶은 욕심이 있음에도 전력을 다하지 않은 나를 탓하곤 했다. 


나는 계속 남들과 비교를 이어갔다. 나보다 노래를 잘하는 사람, 춤을 잘 추는 사람, 공부를 잘 하는 사람 등등. 주변에는 잘난 사람이 넘쳐났고, 나는 항상 뒤쳐져있는 기분이었다. 지인들은 지금도 충분하다는 격려와 위로를 전했지만, 조금 더 잘하고 싶은 마음과 지금이라도 충분하다는 마음 사이에 나는 어떤 노선도 취하지 못했다. 항상 나는 나를 부족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나는 20대부터 자기계발서에 빠져들었다. 조금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서. 어제보다 성장하는 내가 되고 싶어서. 그런데 웬걸, 책을 읽을수록 자신감은 더욱 줄어들었다. 젊은 나이에 성공한 저자를 보며 내 과거를 탓했고, 끊임없이 ‘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되는 실패에 무너졌다. 하지만 마치 무엇에 중독된 사람처럼 동기부여 영상과 책만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세종의 한 마디가 내 머리를 띵하게 만들었다.  

출처 : 서울경제


(어전회의에서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박연이 조회(朝會)의 음악을 바로잡으려 하는데,
바르게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율려신서(律呂新書)》도 형식만 갖추어 놓은 것뿐이다.
 
우리나라의 음악이 비록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세종실록 12/12/7)


세종이 조선의 음악에 대해 한 말이었는데, 꽤나 충격적이었다. 명나라에게 사대외교를 하던 그가 실은 조선의 자주권에 대해 얘기한 것이다. 세종의 명을 받은 박연은 조선의 음악을 정리하게 되고, 정인지는 <아악보>의 서문을 지어 올린다. 


"음악은 성인(聖人)이 성정(性情)을 기르며, 신과 사람을 화(和)하게 하며, 하늘과 땅을 자연스럽게 하며, 음양(陰陽)을 조화시키는 방법이다. 우리나라는 태평한 지 40년을 내려왔는데도 아직까지 아악(雅樂)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공손히 생각하옵건대, 우리 주상 전하께옵서 특별히 생각을 기울이시와 선덕(宣德) 경술년 가을에 경연(經筵)에서 채씨(蔡氏)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공부하시면서, 그 법도가 매우 정밀하며 높고 낮은 것이 질서가 있음에 감탄하시와 음률을 제정하실 생각을 가지셨으나, 다만 황종(黃鍾)을 급작히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그 문제를 중대하게 여기고 있었다. 마침내 신 등에게 명하시와 옛 음악을 수정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12/윤12/1)


세종은 때론 공자의 말이 다 맞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국의 음악도, 공자의 논리도 참고했지만 결국 그것은 조선의 백성을 위한 정책을 만드는 데 활용한 것. 세종의 자주적인 생각은 결국 훈민정음을 창제한 이유로 이어진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字)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집현전 학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도 같은 논리다. 설총의 이두는 맞다고 하면서 훈민정음을 만든 건 왜 틀리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한 번 더 언급한 그였다. 


나는 다시 실록을 들여다보았다. 세종은 보이는 현상만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부족하다 여기면서도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가뭄이 들었을 때 이젠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한탄한 관리에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며 당부했고, 한양에 화재가 났을 때는 금화도감을 설치해 다시는 불이 나지 않게 시스템을 만들었다.


나는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던 걸까? 늘 중간만 했던 아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학생, 욕심은 많으면서 행동은 하지 않았던 사람. 하지만 그렇게 했었다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평생 찾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스물다섯 살에 사업을 시작한 것도, 다양한 경험을 한 것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인데 말이다. 


나를 항상 부족하다 여긴다면 어떤 것도 실행하지 못한다. 중요한 건, 완벽하지는 않으나 나 자체로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잘하는 것이 보이고, 그 강점을 극대화할 수 있으며, 부족한 점도 채울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남들이 완벽한 것도 아니니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세종의 말이 위로가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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