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들고 풀마라톤 뛰는 '백승윤' 찍터벌 인터뷰
러닝크루 가입은 사진 한 장 때문에 했다. 사실 그전까지는 러닝은 무식하고 가난한 운동이라 생각했다. 장비나 기술도 없이 몸뚱이 하나만으로 무작정 뛰는 운동. 근데 우연히 인스타그램에 뜬 러닝사진은 청춘의 향기가 진동했다. 젊고 자유로웠다. 그렇게 언타런이란 러닝크루도, 러닝 포토그래퍼(찍터벌) 백승윤도 알게 됐다.
서울 어드매, 어스름이 깔리면 신상 러닝 옷을 입고 곱게 화장을 한 사람들이 광화문 광장, 잠수교 등 뛰기 좋은 곳에 모인다. 운동을 하러 가는데 한껏 차려입은 이유는 운동도 할 겸, 청춘의 한 컷을 간직하기 위해서다.
러닝크루에는 '찍터벌(러닝과 인터벌 트레이닝의 합성어로 사진을 찍기 위해 뛰다가 기다렸다를 반복해 생긴 러닝 용어)'이 있다. 지난 4년 새, 2030 세대 사이에서는 적게는 10명에서 많게는 150여 명까지 그룹 지어 매주 함께 뛰는 러닝 크루(Running Crew) 문화가 활발하다. 러닝은 찍터벌이라는 촉매제를 만나 젊은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언타런 러닝크루(@u.t.r_crew)는 참가비 1천 원을 내면 운동도 하고, 땀 흘리는 멋진 사진도 공짜로 받을 수 있다. 근데 러닝 사진 찍는 게 보통일이 아니다. 3kg 사진기를 들고 뛰다, 기다렸다를 반복하는 백승윤을 보면서 항상 궁금했다. 왜 사서 고생 할까. 왜 공짜로 사진을 줄까. 왜 풀마라톤에 3kg 모래주머니 같은 카메라를 들고뛰는 걸까.
- 러닝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2019년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보드게임에 빠져 살다 보니 살이 많이 쪘다. 운동을 해야겠다 싶었는데 야구나 축구는 운동장비가 있어야 하고, 동호회에 들어가야 하는 등 자질구래하게 필요한 게 많았다. 근데 러닝은 집에 있는 추리닝이랑 운동화로 되니깐 한 거다. 소모임 어플에 러닝 크루 하나 골라 나갔는데 그게 지금 메인 찍터벌로 활동하고 있는 언타런(@u.t.r_crew)이다.”
- 러닝은 처음부터 잘했냐?
“언타런에 처음 러닝 했을 때, 힘들어 죽을 뻔했다. 러닝 해보기 전엔 군대에서 훈련받고 어렸을 적 육상 선수도 했으니깐 6'00 페이스(1km를 가는데 6분 소요된다는 러닝 속도 단위)도 만만하게 생각했다. 낙오는 안 했지만 고통스러웠다. 근데 좋았다. 앉아서 보드게임만 하다가 오랜만에 땀을 흘리니깐 상쾌하고 몸이 해냈다는 성취감이 새롭고 즐거웠다. 그래서 매주 나갔다. 체력도 러닝실력도 늘었고 오늘까지 계속하고 있는 거다.”
- 뛰는 것도 힘든데 3kg의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다니, 어쩌다가 '찍터벌'을 하게 됐나?
“2020년 뮤런(@murun_official)이라는 러닝크루에 한번 나갔는데 누가 사진을 찍어줬다. 그땐 찍터벌이라는 개념은 커녕, 사진 찍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근데 내가 뛰는 모습을 사진으로 보니 기분이 좋았다. 나도 해보고 싶어서 집에 처박아 둔 오래된 삼성 카메라로 언타런에서 처음 찍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 첫 찍터벌이었던 날이 기억나냐?
“정말 못 찍었다. 기계도 옛날 거였고, 사진 배운 적 없어 무턱대고 찍었으니깐. 처음 사진 찍기 전, 언타런 운영진에게 러닝 사진 찍고 싶다고 말하길 주저했다. ‘왜 나대?’, ‘왜 찍어?’라고 생각할까 봐. 그래도 하고 싶으니깐 말했고 그때 언타런 크루 운영진들이 별말 없었다. 첫 사진은 별로였다. 그래도 누군가는 좋아했다. 당시 운영진도 아무 말 없길래 계속 찍었다. 그 시도가 지금까지 이어진거다.
- 사진을 배운 적도 없고, 장비나 기술이 하찮았는데 지금은 그럴싸한 아마추어 사진가다. 3년 동안 성장하는 포토그래퍼가 된 원동력은 뭔가요?
그동안 사진 실력이 늘 수 있었던 건 두 가지다. 우선 내가 잘 찍고 싶다는 욕심, 두 번째는 찍터벌들 끼리 정보를 공유하는 문화 때문이다. 찍터벌의 원동력은 사람들이 내가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줄 때다. 사진을 보고 좋아할 때 가장 기쁘다. 이왕 찍은 거 찍힌 사람이 좋아하면 좋고, SNS에 쓰이면 더 좋다. 그러려면 잘 찍어야 하니깐 장비 욕심을 내고, 보정 공부하고, 다른 사진을 참고하면서 새로운걸 적용한다.
찍터벌 끼리 사진을 찍어주고, 정보 공유하는 조합이 생긴 것도 큰 도움이 됐다. 점점 러닝 크루 시장에 찍터벌이 많아지면서 우리끼리 모여서 러닝정보를 공유하는 '불나방 조합(@photounion_bulnabangz)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러너들 찍느라 우리 사진은 없는데, 우리끼리 만나서 러닝하고 서로 찍어주고 잡담도 하다 보니 사진 공부가 겸사겸사 됐다. 만나서 각자 스타일 대로 찍어주면서 자극도 되고, 새로운 장비, 보정 정보도 공유한다. 서른 명이 모인 이 조합 덕에 러닝 찍터벌들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 됐다. '저 친구 사진이 괜찮네?', '쟨 어떻게 찍지?' 직접 보면서 서로에게 동기부여나 자극하는 선순환이 이뤄졌다.”
- 러닝, 사진 둘 다 좋아도 그렇지, 풀마라톤에 3kg이 훌쩍 넘는 카메라를 들고뛰는 건 무리일 텐데. 대한민국의 메이저 풀 마라톤(2023년 동아 서울 마라톤, 2022년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에 모두 카메라를 들고뛰었다.
"풀 마라톤에 사진기를 들고 뛴 계기는 '응원단 찍어주고 싶어서'다. 인생 세 번째 풀마라톤에서 사진기를 들고뛰었다. 계기는 조선일보 신문에 실린 마라톤 현장 사진에 톢톢 러닝 크루 응원단 사람들의 사진이였다. '오 나도 이렇게 찍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응원단이 주로자(走路者)를 찍어주는 사진은 많아도, 주로자가 응원단을 찍어준 사진은 없으니깐. 주로자 시선에서 응원단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세 번째 풀 마라톤인 작년 춘천 마라톤 때 카메라를 들고 뛰었다.”
요즘은 운동 유튜버가 많아지면서 고프로를 들고 뛰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모습을 찍기 위해서 들고뛰는 사람이지 함께 뛰는 러너나 응원단을 위해 카메라를 들고뛰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백승윤은 기록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카메라 들고뛴다. 속도가 느린 풀마라토너 친구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가장 늦게 출발하고, 속도가 좀 느려지더라도 응원단이랑 깔깔거리고 포즈도 취하면서 뛴다. 러너로서 기록을 단축하고 싶은 욕심, 손목에 모래주머니를 걸고 뛰는 힘듦보다 응원해 주는 친구를 찍고 싶다는 애정이 앞선 거다.
"풀 마라톤을 해본 사람은 알 거다. 응원단 없이는 완주자도 없다는 걸. 카메라 들고뛰면 균형도 무너지고 손목에 무리 간다. 3시간 넘게 3kg짜리를 계속 들고 있어야 하니깐. 근데 받은 응원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다. 첫 풀마라톤(2019년 JTBC 마라톤) 때 톢톢(@toktokhareclub) 응원단 친구들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때 풀마라톤 준비 하나도 안 하고, 필수 준비물인 에너지젤도 안 챙겼다. 당연히 26km 지점부터 몸과 정신이 퍼졌다. 36km까지 탈진 상태로 기었다. 근데 그 구간 동안 톢톢 친구들이 에너지젤을 쥐어주고, 정신 차리라고 등 두들기거나, 완주라도 하자고 같이 뛰어줬다. 난 응원이나 격려에 감동하거나 고마워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정말 감동했고, 힘내라고 말하는 친구의 말에 정말 힘냈다. 그리고 완주했다. 본인이 뛰는 것도 아닌데, 선수들 주겠다고 이것저것 챙겨서 땡볕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사진 찍고 환호하는 것. 그 순간도 '러닝'이고 멋지니깐. 찍고 싶다"
- 러닝훈련이든, 마라톤 대회든 하루 내로 보정까지 된 사진이 공유된다. 사진 찍고, 뛰고, 기다리느라 피곤할 텐데, 요즘 셀렉과 보정은 AI 로봇이 알아서 해주냐?
"사진 찍고, 셀렉하고, 보정하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한다. 찍터벌로서 가장 뿌듯한 때는 '내 사진이 쓰일 때'다. 특히 SNS에 메인사진으로 걸리면 기분 좋다. 사진이 쓰이려면 러닝이 끝나고 여운이 뜨끈뜨끈 남아있을 때 전달해야 한다. 그래서 마라톤이 끝나고 바로 작업에 돌입한다. 나도 피곤해서 자고 싶지만, 이제는 ‘그 생각이나 할 시간에 빨리 보정하자’ 생각한다.
얼마 전, 언타런 크루 25명이 단양 마라톤에 참가했다. 대회를 마치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서 마라톤 참가자들이 녹초가 돼 버스에서 꿀잠 잘 때, 백승윤은 사진을 셀렉하고, 핸드폰으로 보정 해 그다음 날 사진을 공유했다. 동아 풀마라톤을 완주하고 백승윤이 잠실 어드매 고주망태가 됐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사진은 다음날 오후에 약 300장이 공유됐다. 같은 풀마라톤을 뛴 나는, 15시간을 내리 잤다. 출근도 겨우 했다. 함께 뛴 3년 내내 사진이 3일 이상 늦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로 성실했다.
"찍터벌은 각자 소속된 크루에 애정이 각별하다. 멤버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어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다. 그리고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늦어도 이틀 내에 사진을 공유하는 게 우리의 관성이다. 사진은 그 노력의 결과물이다. 하지만 SNS에 색감을 바꿔서 올리거나 포토 계정을 태그(언급)를 안 하면 속상하다. 무시당한 기분도 든다. 색감은 포토그래퍼의 정체성이다. 약간의 보정은 이해하지만, 색감은 건들지 말아야 한다. 사진 빨리 달라고 채근하는 것도 속상하다. 내가 즐거워서 하는 일이지만 우릴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도,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지도 말았으면 좋겠다.
- 러닝은 4년 전 백승윤을 어떻게 바꿨나요?
"함께 성취할 줄 아는 사람이 됐다. 보드게임 할 적에는 내향적이고 승리에 집착했고 승부욕도 엄청났다. 근데 러닝을 하면서 ‘함께’라는 가치를 배웠다. 클리셰(cliché)고 오글거리는 말이지만 진짜다. 그리고 외향적여졌다. ‘같이 놀자’라고 했을 때, 환영받는 곳도 많아졌다. 같이 운동할 때, 사진으로 기억을 붙잡는 사람이니깐.
- 앞으로 러너로서, 찍터벌로서 목표가 있다면?
"올해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JTBC마라톤도 카메라를 들고 3시간 40분 안에 완주하는 것이 목표다. 이미 동아마라톤에서는 성공했다. 생각보다 들고 뛸만하다. 2025년엔 보스턴 마라톤 뛰러 갈 거다. 계속 뛸거다. 뛸 때 자유로우니깐.
지난 3월, 나는 동아마라톤 풀을 완주했다. 3년 전 사진 한 장 얻으려고 러닝크루에 들어왔던 시절, 감히 풀마라톤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저 매주 따박따박 예쁜 사진을 얻는 걸로 만족했다. 러닝이 즐겁긴 해도 막상 뛰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다. 게다가 평일 저녁에 러닝 하려고 칼퇴하는 것도 눈치 보였다. 그런데 다음날 사진 속 땀 흘리는 모습, 멤버들과 웃고 있는 걸 보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사진 속 모습에 취해서 매주 나가다 보니 러닝 실력도, 체력도 늘었다. 그리고 풀마라톤에 도전하게 됐다.
첫 풀 마라톤인 2023 동아마라톤을 뛸 때, 7km 넘어가자 현타가 왔다. ‘왜 뛰지?’ 그때, 백승윤이 뒤에서 나타나 사진 찍어주곤 캥거루처럼 통통 뛰어갔다. 32km 지점을 넘어갔을 때부터 풀마라톤 신청한 과거의 나를 혐오했다. 피니쉬 라인(Finish line)에 거의 기어 들어갔다. 백승윤이 ‘왜 이렇게 늦었냐’며 구박했는데 ‘대답할 힘없고, 빨리 사진이나 찍어. 인생 마지막 풀 마라톤 증거 남겨야 하니깐’라고 말했다. 그 다음 날 사진을 받았는데, 사진 속 달리는 나는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리고 잠실대교 땡볕 아래, 나를 응원하기 위해 기다리는 언타런 친구들 사진도 있었다. 눈물이 왈칵 났다. 또 풀 마라톤 뛸 거다. 이게 다 사진 때문이다.
[서울 취미 러닝 크루 및 인터뷰이 SNS]
1. 인터뷰이 백승윤 러닝 포토그래퍼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class0321/
2. 인터뷰이 백승윤 러닝 포토그래퍼가 쓰는 카메라 기종: SONY A7 M3
3. 서울 강북 최대 러닝 크루 언타런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u.t.r_crew/
4. 서울 최대 러닝 크루 톢톢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toktokhare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