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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인기 강사가 되어버리면 어떡하지?

1.1 배치계획-1

배틀그라운드 같았던 배치계획. 두 해 동안의 공부 과정이 담긴 오답노트 두 권.



나는 배치가 가장 어렵다. 공부를 시작한 첫 해 100일 동안 세 과목을 동시에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시험 한 달을 앞두게 되자 적어도 평면설계와 단면설계에 대해선 안정권역에 진입했다는 안도감은 있었다. 그러나 1교시 제 1과제인 배치계획은 어찌된 것인지 문제를 풀 때마다 늘 찜찜한 것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과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솔직히 의문스러웠다. 대지조닝 및 분석은 그에 비해서 시간만 좀 주어진다면 해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있었다. 그러나 싱크홀 같은 배치를 두고 대지의 잔구멍을 살필 여유가 없었다. 결국 첫 번째 시험은 대지는 30점대 초반, 배치를 20점대 중반으로 마무리 하여 커트라인 60점을 넘지 못하고 불합격하였다.



두 번째 1교시 시험을 목전에 두고, 잘하면 이번 시험에는 80점대로 합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행복한 꿈이었다.) 무엇보다 대지 조닝 및 분석에서 그 전에는 느낄 수 없었던 안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두 개 중 하나를 확실하게 잡으니, 그 나머지 하나에 대한 심리적인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 해야할 양이 전년에 비해 40%로 줄어드니 좀 더 차분하고 깊게 살펴 보고자 하는 의욕도 불타올랐다. 그래서 이참에 여태까지 풀었던 2년치 문제들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실제로 이 며칠 간의 정리 작업을 하고나서 그런지 배치계획 점수가 점차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학원 실전 문제를 풀거나 모의 시험을 보면 60점 만점에 기본적으로 40점 중반은 거뜬히 넘겼다.






2년 동안 풀은 기출 시험문제와 학원 문제를 합하니 모두 60여 장은 되었다. 일단 데이터 양은 충분했다. 배치 유형 정리는 다음과 같은 기준을 두고 진행해보았다.

1. 대지 내 동선 유형을 크게 '보차 분리'와 '보차 통합' 두 가지로 나눈다.
2. 소분류로서 대지 형태와 인접 도로 위계의 관계에 따라 4-5가지로 나눈다.
(ex. 도로 1개만 대지에 길게 혹은 짧게 접해있는 유형, 도로 2개 중 주(主)도로가 대지에 길게 혹은 짧게 접해있는 유형 등.)


이 작업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어떤 뚜렷한 목표가 있거나 기대효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배치계획의 프로세스를 유형 정리로 접근하면, 그 유형에 따라 답안을 도출하는 접근 방식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다. 한 마디로 출제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가령 '대지 형태와 도로 상황이 이러이러한 유형이니 이러이러한 배치 유형이 나올 수 있겠군.'과 같은 일련의 판단 과정에 있어 정리 작업이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반대로 답안 자체를 익힘으로써, 배치계획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내가 직접 공부한 유형들을 레퍼런스로 능숙하게 활용하기를 바랐다. 실제로 그 뒤로 풀었던 학원 문제들을 보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텅 빈 답안지에 마치 희미하게 전체 그림이 보여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는데, 학원 문제들이 내가 정리했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일상의 공부는 무척 순조로웠다. 다만 그 해 시험에선 완전히 다른 유형이 등장했을 뿐이었다.



유형을 분류하기 위한 배치 모음 작업




창작거리에 서서 의심을 품다



내가 학원에서 늘 안정적인 점수가 나왔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풀었던 학원 문제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의 현황 대지가 동선 축과 조닝이 명쾌한 편이었고 특히 네모난 땅에 직교체계로 계획하는 답안 비율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까 나는 네모난 땅에서 나올 수 있는 동선의 모든 변수들을 정리해 본 셈이다. 그래서 그 후에도 학원에서 네모난 땅에 대한 문제를 낼 때마다 명쾌하게 접근했던 것이었다. 한편으론, 깔끔한 그림으로 정리가 될 수록 무언가 점점 괴리되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는 배치에 대한 실무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문제만 많이 풀어봐서 그런지, 이 배치계획이라는 과목이 조금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종종 느꼈다.



배치계획은 지문도 참 촌스러운 매력(?)이 있다. 2017년에 출제된 문제는 아직까지도 그 답안이 머릿 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어서 지금도 똑같이 그릴 수 있을 정도다. 그 문제에서는 대지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너비 8m의 밋밋한 공공 보행로를 계획하라고 한다. 이름하여 그 위대한 ‘창작거리’다. 이벤트, 교류, 소통, 화합의 공간이라고 부연 설명이 되어있다. 마치 드론, 로봇, 메타버스, 4차 혁명의 이벤트 공간이라는 문구 만큼이나 애매모호하다. 언젠가는 한창 스터디 모임을 하던 한 여름 어느 날, 멤버들과 식사를 해결하러 뙤약볕이 일렁이는 장충동의 어느 넓직한 보행로를 걷다가, ‘오오 여기가 바로 창작거리가 아닌가!’ 하고 셋이서 한참 실없이 낄낄댔던 적도 있었다.



그 이후로부터 2017년 기출을 마주할 때마다 그 장충동의 족발 거리가 떠올랐다. 가판대도, 벤치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사선 패턴으로 포장된 너비 8m의 보행통로. 점심 시간이면 건물에서 사람들이 이 사선으로 해치 표시가 된 보행로로 우르르 몰려 나오다가도, 여름의 복사열을 피해 어디론가로 금세 또 사라져버릴 것만 같다. 나는 가끔 창작거리 가운데에 멀뚱히 서 있는 상상을 해본다. 거리를 중심으로 양분화 된 적절히 조닝이 된 3층 캠퍼스 건물들과 마당들을 떠올렸다. 공기도 낮게 눌려 흘러갈 듯한 납작한 공간감이다. 문득 생각했다. 배치계획에서 건축가가 꼭 고민해야 하는 중요한 것들이 있다면, 이 시험은 그 중 몇 가지를 평가하고 있을까? 내가 건축사가 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할 정도로 그 기준들이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하지만 이런 의문들을 던져봤자 내 슬기로운 수험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그 날도 나는 아주 납작하게 눌린 뭔가를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완료된 배치 유형화 작업. 이쯤 되면 지나가는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침 튀기며 프레젠테이션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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