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희재 Oct 30. 2022

돌고 돌아 화일이었다

0.4 오답노트


두 해에 걸쳐 오답노트를 만들고 정리하면서 괜찮은 형식을 찾아보려고 노력했었다. 어떻게 만들어도 아쉬움이 있었고, 내용을 추리기 전에 형식 먼저 갖추다가 시간을 허비하게 될까 불안했다. 첫 해에는 조급한 마음에 A4 크기의 스프링 노트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는데, 시험지를 축소 복사해서 오려 붙이는 아주 고전적인 스크랩 형태로 정리하였다.



스프링노트 오답노트는 바로 위에 필기도 할 수 있고 사용에 매우 직관적이다. 그러나 시험지를 포맷에 맞게 오리고 딱풀이나 스카치 테이프로 붙이는 과정이 다소 번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매 숙제를 스캔해서 디지털 파일로 만든 뒤 포맷에 맞는 크기로 축소 복사해야 하기 때문에 종이도 많이 소모된다. 무엇보다 문제를 많이 풀 수록 종이가 계속 덧대지다 보니 오답노트의 무게가 상당히 무거워지는 단점이 있다. 나는 자동차 면허가 아직 없던 뚜벅이었고, 자습실 출퇴근 등의 이동에는 대중교통을 전적으로 이용했었다. 길 위의 시간이 아까워 오답노트를 꺼내 자주 훑어보고는 했는데, 노트 무게가 갈 수록 무거워지니 내 손목 뿐만 아니라 기껏 공부하겠다고 마음먹은 의지도 그 무게에 꺾일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1교시를    공부해야 했던  번째 해는 오답노트의 형식을 조금 다르게 해보기로 했다. 일단 종이 인쇄량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싶었는데, 태블릿 기기와 어플을 사용하면 획기적으로 해결될  같았다. 남편에게 혼수(?) 받은 아이패드 1세대 12.9인치를 사용해서  참에 유용하게 써볼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러려면 태블릿 기기를 마치  신체의 연장선상에 있듯 능숙하게 다뤄야 하는데  직관성이  실물노트만 못했다. 역시 나도 기계 문명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는 흔한 늙은이  하나 뿐이. 며칠 동안 이런저런 어플을 깔고 살펴보다가 결국 태블릿 기기를 쓰는 것은 포기해버렸다.



그래서 선택한 것은 결국 비닐 ‘화일’이었다. 비닐에 종이를 끼워넣는 식의 아주 단순하고 흔한 파일링 형식이다. 알파 문구와 서점 등을 뒤져서 여러 제품을 물색한 뒤 제일 적합한 것을 골랐다. 커버가 뒤로 젖혀질 수 있어 이동 중에 보기 편하고, 1년치 학원 숙제를 담기에 정량인 비닐 20매 짜리 얇은 두께의 것이었다. 종이를 아예 안 쓰는 것은 (이 몸이 늙어) 불가능하고, 대신 인쇄 매수를 최대한 줄이기로 했다. 시험지와 답안을 스캔하면 pdf로 최대한 레이아웃을 A4 한 장으로 정리한 뒤 한 번에 인쇄하면 되었다. 직접 해보니 휴대성 측면에서 스프링노트보다 비닐 파일링 방식이 더 선호할 만 했다. 이따금씩 간단한 필기나 줄을 칠 때 비닐에서 종이를 꺼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는 것 정도 말고는 전반적으로 괜찮았다.



전년도에 쓴 스프링노트와(좌) 그 다음 해에 바꾼 비닐 화일(우)



오답노트를 정리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대중교통 이용 중에 보기 편할 것  

    정리하는데 시간을 최소화 할 것  

    인덱스 정리를 잘 할 것  



가끔씩 커버가 딱딱한 3공이나 2공 파일에 도면 꾸리듯 노트를 만드는 사례를 몇 번 봤다. 사무실 구석에 굴러다니는 놈을 하나 집어다가 간편하게 뚝딱 펀칭해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런 오답노트는 정리할 때 시간은 굉장히 단축되지만, 들고 다니기에는 크기도 크고 무겁기도 엄청 무거워진다. 휴대성이 떨어지는 물건은 필요한 순간에 내 옆에 없을 확률이 아무래도 높을 것이다. 실시설계 도면 꾸러미 같은 오답노트는 자기 주인 자동차 조수석이나 뒷좌석에 앉아 세상 구경만 징하게 하다가, 결국엔 학원 자습실 사물함 위에 짱박히게 될 운명을 맞이하게 될 지도 모른다. 과정이 조금 번거롭더라도 오답노트의 포맷을 작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루에 풀어야 할 문제를 뜨거운 집중력으로 수행하고 나서, 오답노트를 정리해가며 몸과 마음을 쿨다운 시켜보자. 귀찮기만 한 작업 같아 보여도 의외의 진정 효과가 있다.






좋은 오답노트란, 활용성이 높고 공부한 내용이 체계적으로 집약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답노트는 일상과 아주 긴밀한 물건이어야 한다. 그 날의 내용을 수시로 복기하고, 필요한 것은 그 때 그 때 확인하는 용도다. 검색이 편하다는 것은 그 노트의 세계에서 나름의 체계성을 갖추고 있다는 말과 같다. 문제를 푸는 요령과 배경 이론은 물론, 해결하지 못한 궁금증이나 고민도 집약적으로 잘 정리되어 있어야 한다. 매일 조금씩 시간을 들여 꾸준히 꾸려나가다 보면, 어느덧 내 수험 생활과 최적화 된 형식의 결과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시험장에 입장하여 착석하여 차분히 숨을 고르며 여태까지 다듬어 온 오답노트를 펴서 그간의 공부 내용을 마지막까지 훑어볼 수 있다면, 그 노트도 역시 장렬하게 본인의 최후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되겠다. 결론적으로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는 오답노트가 좋은 오답노트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왼쪽 장엔 지문 두 페이지와 오른쪽 장엔 학원답안, 내 답안을 비교하여 구성한다.




이전 07화 미물의 연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