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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블루보틀로 머리를 맞은 듯

1.1 배치계획-2

두 번째 시험을 앞두고 일주일 전, 06년도 기출을 푼 뒤의 낙서.



문제는 시험 당일, 지형의 경사가 심하고 정형적이지 않은 땅이 나왔는데 단지 내 동선도 여태껏 기출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순환동선이 나왔다. 나는 평소 1교시를 풀 때 제1과제인 배치를 먼저 풀기보다, 제2과제인 대지조닝 및 분석을 먼저 풀어서 시간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연습을 했었다. 2019년 시험 당시 먼저 풀었던 대지조닝 및 분석을 단 50분 만에 끝냈고 이 때까지는 매우 행복했다. 배치에 2시간 10분을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 시간 운영에 스스로 매우 만족해 하면서 여유롭게 배치 문제 지문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30분, 그리고 1시간 30분이 지나도 트레이싱지 위 답안을 아무리 그려도 진전이 없자, 나는 등골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배치 유형화 정리로 완성한 내 팔레트를 회심의 무기로 준비했는데 문제가 준비했던 유형에서 벗어나니 전혀 쓰지를 못하는 것이다. 평소와 같이 차분한 마음이었으면, 오히려 팔레트에 없다는 사실을 역발상하여 답안을 떠올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시간 반이 넘도록 트레이싱지에 이제 자리가 없을 정도로 여러 대안을 빙빙 그리며 헤매기만 했다. 결국 아무리 늦더라도 작도를 시작해야 하는 시간이 되었고 나는 급한 마음에 제대로 된 구상도 없이 답안지에 바로 가선을 쳐 그리기 시작했다. 잘 될리가 없다. 아니다 싶으면 몇 번이고 지우개로 지우다보니 그림도 없이 점점 종이만 더러워져갔다. 손이 떨리는 것을 진정시키기 위해 몇 번의 긴 호흡을 했다. 그리고 결국 있어야 할 정보의 70% 밖에 작성하지 못한 너덜너덜하고 더러운 답안지를 제출하고 말았다.



시험장을 퇴장했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남편을 만났다. 점심시간이니 점심을 먹어야 했다. 시험장 근처에서 입소문이 유명하다는 평양냉면 집을 찾았다. 차가운 면발이 위장에서 똬리를 꼬며 순환동선을 그렸다. 그렇게 기다리던 해방의 날 맛집에서 식사를 마쳤으면 또 까페를 가봐야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당시 성수역에 갓 론칭한 지 얼마 안 된 까페 '블루보틀'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그 때까지 조용히 있다가 운전을 하는 남편 옆 조수석에서 나는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좀 오락가락하여 “시방, 망한 것 같어.” 좌절하다가도 갑자기 “잘 하면 붙을 수도 있겠는데?”하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뒤집으며 소리치는 것이다. “세 번째 시험을 또 준비해야 돼, 시방!”  



블루보틀에 도착해 남편이 카운터로 주문을 하러 갔다. 나는 테이블에 멍하니 앉아 있다가 도저히 머릿 속에 떠도는 잔상을 가만 둘 수가 없어, 스케줄 노트 빈 공간에 아까 시험장에서 풀려고 애썼던 배치 조닝을 다시 해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걸리지도 않아 답안이 나온 것이 아닌가. 그것도 내가 제출한 답안과 아주 다른 모양의 답안이. 허허 하고 실소가 터지며 몸에 기운이 줄줄 빠져나가는 듯했다. 저 멀리 파란 병의 로고가 보였다. 그간 석 달의 시간이 같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블루보틀로 머리를 맞은 듯한 날이었다.





결론은 2019년 배치계획에서 65점 만점에 35점을 맞았다. 대지조닝 및 분석 점수와 총 합계 65.5점으로 그 해 1교시를 합격했다.



배치를 잘 하는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면, 배치계획은 퍼즐을 푸는 것과 같다고 한다. 나는 큰 스케일의 조닝은 거의 틀린 적이 없었다. 지문의 조건을 놓치지 않는 한 세부 조닝 다이어그램도 대안을 만들어 잘 정리할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트레이싱지 위의 그 얼기설기한 다이어그램이 A3 답안지에서도 완벽하게 들어맞추기가 늘 어려웠다. (그나마 유형화 작업을 마친 수험시기 후반에서는 잘 들어맞기 시작했는데, 머릿 속으로 건물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려보며 다른 세부 배치 대안을 떠올려본다거나 하는 훈련이 늘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트레이싱지와 답안지 사이의 간극이 어쩌면 ‘감각’의 영역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 감각의 영역에서 잘 헤매도록 인도하는 가이드라인은 각 학원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단 트레이싱지에 조닝을 도식화하여 간략 답안을 잘 작성한다. D학원은 건물들을 답안 스케일 크기에 맞춰 (혹은 현황도 스케일로) 트레이싱지에 그린 다음 실제로 가위 등으로 잘라서, 직접 답안지 종이 위에 이리 저리 배치를 하면서 풀라고 한다. 사실 이 것은 제일 직관적이기 때문에 실무에서 배치계획을 할 때에도 제일 많이 쓰는 방법이다. 게다가 시험 규칙에서는 나눠준 트레이싱지를 자르면 안 된다는 규정이 딱히 없으므로, 이를 이용하여 도구를 유연하게 활용하는 것이다.



내가 다녔던 학원은 트레이싱지를 자르지 않고 그림을 그려가며 답안을 도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가장 힌트가 뚜렷한 퍼즐 조각부터 출발하여 그 주변의 것들을 하나 하나 맞춰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퍼즐 조각들이 대지 내 가로 세로 수치가 맞으면 확신을 중간에 가지고 풀어간다. 이 방법은 배치 답안이 직교 체계일 때는 헷갈리지 않고 풀 수 있는데, 만일 대지에 지형이 있거나 축이 비틀어져 있으면 나같이 공간지각 능력이 없는 사람은 매우 헷갈리기 쉬웠다. 게다가 짧은 시간 안에 대안을 여러 개 파악하고 바로바로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답안지를 본격적으로 작성하기 전 어떤 대안을 선택했으면 이것이 확률적으로 정답이기를 바라는 불확실함을 지닌 채 풀어가야 했었다.



시험 한 달 전 나는 K선생님께 긴급 상담을 요청했었다. 아무래도 D 학원의 방안이 나한테 더 맞을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자, 선생님은 여기 방침대로 더 열심히 훈련해보기를 권했다. 어떤 한 방법을 익히고 체화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법인데, 중간에 이리 저리 방법을 바꾸다가는 시간만 소모하게 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결국 방법을 바꾸지 않기로 했다. 지금에야 그 때 좀 더 마음의 여유를 갖고 시도는 한 번 해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문제점은 내가 잘 아는데, 좀 더 주관을 가지고 판단했어야 했다.



나는 실무에서 마스터플랜을 계획했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그 감각의 영역이 실제로 실무에서 단지를 설계할 때 대체 어떤 방식으로 긴밀히 작용하는지 잘 모르겠다. 출제자가 만들어 놓은 퍼즐 정답을 맞추기 위해서, 그 감각을 함양하는 것이 건축사 시험에 평가할 정도로 중요한 것인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언젠가 건축가의 조상신 임호텝께서 ‘감’을 내려주시지 않을까 희망을 놓지 않고 끝까지 열심히 하였으나, 백일 간 노력했던 것에 비하면 반타작에 가까운 점수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맥이 빠지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앞으로 소규모로 영세하게 건축일을 해 나가려는 나에게, 대단지 마스터플랜을 계획할 일은 인생에서 거의 없을 거라는 것이다. 두 해에 걸쳐 200일 동안 열심히 공부한 배치계획이라는 과목은 결국 실물 경험과 비교해 볼 기회도 갖지 못하고, 동떨어지는 이론 지식의 조각들로 남게 될 것이다.



그게 나는 제일 아쉽다.



시험 직후 블루보틀 까페에서 끄적인 배치 조닝 다이어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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