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스터디그룹
먼저 제안을 한 것은 주연 언니였다. 주연 언니는 이태원에서 적정건축이라는 사무소를 2015년부터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와 학번이 7년 차이가 나는 대학교 선배였다. 마침 언니는 내가 다니는 학원 근처의 D학원을 등록해서 다니고 있었다. 일단 만나서 이야기 해 보자고 하자, 언니는 같은 학과 또래 친구, 그러니까 나한테는 또 다른 선배인 경진언니를 불렀다. 경진언니는 한 유명 아뜰리에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퇴사 후 양재의 H학원을 등록해놓고 넘쳐나는 숙제에 괴로워하고 있던 중에 호출을 받았다. 우리는 교대역 근처 한 까페로 모여 천장고가 매우 낮은 다락 같은 복층 구석에 자리를 잡아, 본인의 현재 공부 근황 이야기부터 천천히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 셋 모두 이번이 첫 시험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나는 마지못해 쭈뼛거리며 만나러 갔던 것 같다. 처음에 이 그룹에 대한 확신이 별로 없었다. 각자 다니는 학원이 달라 제대로 지속될 지부터가 미심쩍었다. 만약에 셋이 모두 같은 학원 소속이면 서로 자습실 출석체크도 하고 숙제도 같이 풀고 답안에 대한 열띈 토론도 하고 식사도 같이 하면서 건축사 협회를 규탄하다가 이 뜨거운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 다같이 오뎅바라도 가서 오뎅과 사협회를 동시에 뜯는 등 좀 더 효율적이면서 생활에 밀착되는 운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셋이 모두 다른 학원에 다니고, 매주 풀어야하는 문제들도 달랐다. 특정 학원 자습실에서도 모일 수 없으니 장시간 이용할 공간부터 구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무엇보다 6-7년 학교 선배들이라면 내가 제대로 모셔야 되지 않겠는가. 주연언니는 안면이 아주 조금 있는 정도고 경진언니는 이번에 처음 인사를 한다. 어려워해야 하는 분들인데 혹시라도 내가 눈치없이 대선배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결례를 저지르게 될까봐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초기에는 각자 매주 숙제를 공유하는 건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다. 숙제를 세 장씩 (불법) 복사해서 같이 풀어가며 세 학원의 장점을 뷔페처럼 마구마구 취해보자는 것이었다. 같은 문제를 풀어도 세 명이 작성한 답안이 각각 다를테니, 각 학원의 강의 포인트를 공유하며 어떻게 하면 답안에 가까워질 수 있을지 분석하고 토론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고민스러웠다. 셋 모두 막 공부를 시작한 상태라 건축사 자격 시험 자체에 대해 아직 파악이 안 된 상태였다. 방향을 잘못 설정했다가는 아까운 시간만 허비할 수도 있었다. 학원 자습실에서 고민하며 앉아있다가 마침 학생들 순찰을 돌고 계신 K선생님께 자문을 구해보기로 했다. 놀랍게도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명쾌한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이것이 원장님의 짬밥이구나) 문제는 과년도 기출문제를 몇 번이고 돌려가며 풀되, 시험 실전처럼 시간에 맞춰 푸는 훈련을 주요 목표로 잡으라는 것이었다. 특히 실전 훈련은 혼자서 하는 것보다 다같이 하게 되면 훨씬 더 능률이 좋으니, 스터디모임의 장점을 적극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선생님은 학원 숙제를 같이 푸는 것은 추천하지 않으셨다. 물론 저작권의 문제가 있기도 했지만, 세 학원이 정답을 유추하는 관점과 중요 포인트가 상당히 다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결론 없는 무한토론의 늪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고 했다. 이 내용들을 언니들과 공유했고, 다행히도 모두 납득하며 동의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몇 번의 모임과 시행착오 끝에 몇 가지 기본적인 규칙을 정했다.
매주 토요일 적정건축 주연언니 사무실에서 만난다.
과년도 기출문제를 반복해서 푼다.
시간에 맞춰 완도하는 훈련을 제일 우선한다. 답안 토론은 30분을 넘기지 않는다.
시험 한 달 전부터는 실제 시험 시간과 최대한 똑같이 조성하여 모든 교시의 문제를 푼다.
모임 초기에는 제한된 3시간 안에 도면을 완성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30분이 더 주어져도 완도의 기미가 안 보여 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나마 내가 이 중 완성도가 나은 편이었는데, 언니들은 나와 달리 생계 활동을 병행하고 있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무척 제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시험은 석 달이 남았으니 조급해하지 말며 위로했다. 3시간 외 필요한 추가시간을 점차 줄여가는 방향을 잡고 꾸준히 토요일 모임을 지속했다. 그렇게 시험일이 가까워질수록 추가시간이 30분, 20분, 10분씩 점진적으로 줄어졌고, 마지막에는 완도를 해 나갈 수 있었다. 공부에 모든 시간을 투자했던 나는 셋 중에서 도면 완성을 제일 빨리 해나갔고, 자연스럽게 채찍을 쥐어 리드해 나가게 되었다. 우리는 단체 카톡방에서 모르는 것을 수시로 물어보기도 하고, 나도 여러 공부 팁들을 언니들과 공유해나갔다.
첫 해 시험에는 한 번에 붙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 다음 해에도 슬프고 지겨운 마음을 억누르며 모임이 재개되었는데, 스터디 장소로 쓰던 주연언니의 사무소가 중간에 한 번 이사를 하느라 붕 뜨는 기간이 생겨, 강남의 후미지고 저렴한 독서실을 물색하며 전전하기도 했다. 무거운 제도판과 작도 도구들을 잔뜩 짊어지고 강남대로를 터덜터덜 걷는 모습이 좀 처량했다. 그러다가 적정건축이 이태원에 새 공간을 무사히 마련하게 되자 우리는 유랑을 끝내고 비로소 정착하게 됐음에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사무소는 보통의 건축사사무소와 다르게, 주거지역 한복판 건물 1층에 자리잡았는데, 전면에 커다란 쇼윈도우가 있었다. 바로 이전 임대 직종이 네일샵이었다고 하는데 주연언니는 입주 전 인테리어 공사를 하면서 이 전면 유리를 그대로 남기기로 했다.
저녁이 되어 동네가 어둑해지면 적정건축 건축사사무소 쇼윈도우는 등대처럼 골목을 환히 밝혔다. 밤이 되면 데이트를 하는 커플들이나 동네 주민들이 지나다가다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무실을 빤히 쳐다봤는데, 세 여직공이 커다란 작업판에 어깨를 수그려 밤 늦게까지 가내수공업을 하는 광경이 쇼윈도우 너머로 펼쳐졌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도면을 그려갔다. 그리고 언젠간 이 치욕을 딛고 일어서리라 다짐했다.
모임을 재개하던 두 번째 해는 나는 한 과목만 준비하면 되어서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두 언니가 두 과목을 푸는 동안 혼자 1교시 학원 숙제를 하나 더 풀곤했다. 풀이가 끝나면 언니들 한 것을 같이 보며 코멘트를 해주기도 했다. 선이 불분명합니다, 가선은 연하고 빠르게 그리세요, 프로세스대로 푸세요, 시간을 좀 더 들여서라도 지문을 꼼꼼히 읽어보세요, 허투루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 때가 아니면 언제 또 하늘 같은 선배님들께 꼰대질을 하겠는가.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넓고 든든한 두 선배의 등짝에다 열심히 채찍질을 했다.
생각해보면 그룹 스터디를 할 수 있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그 때 주연 언니의 첫 호출에 조금 주저하는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약속 자리에 나간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나는 학창시절 학교 선배라는 존재들과 같이 동아리나 공모전 같은 자율적인 활동을 해 본 경험이 전무하다. 우리가 다녔던 학교는 서울 소재의 한 여대였고, 타 남녀공학에 비해서 전반적으로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있었다. 전역한 복학생 또한 물론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군대 문화와 관련된 집단주의의 색깔은 매우 옅은 편이었다. 따라서 특정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선후배가 같이 엮이고 교류하는 것이 매우 드물었다. 최고 학년인 5학년 학생들이 졸업전시 작품을 준비할 시즌이 찾아오면, 학과 행정실에서 엑셀을 돌려 랜덤으로 후배 도우미를 각각 공평한 숫자로 지정해 줄 정도였다. (보통의 경우에는 선배가 알아서 아는 후배를 데려다가 자율적으로 준비한다. 학교가 여기에 개입하는 일은 없다.) 우리 학교에서 선후배간의 참된 도리라 함은 서로의 길을 방해만 하지 않는 것(?)이라는 우스갯 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처음엔 그 특유의 개인주의적인 각자도생 분위기가 적응이 안 되기도 했다. 열심히 학점을 챙기는 성실한 친구들 사이에서 이내 좌절감과 (이 년들 공부 하나도 안 했다고 시험장에서 호들갑 떠는거 분명히 들었는데) 고립된 느낌이 들기도 했고 진지한 이야기를 같이 나눌 친구를 찾는데도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1학년 때는 집단주의적인 분위기의 학생회나 이런저런 동아리에 잠시 발을 담그기도 했으나, 학년이 올라가고 회원 모집의 시기가 오면서 자연스럽게 탈퇴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느 것이 내게 어울리고 맞지 않은 옷인지 탐색하는 시기를 길게 거치고나니, 나는 이내 곧 학교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설계실 학우들과의 적당히 두루두루한 교류도 좋았고, 내 공간이 있는 설계실에 박혀있다가 시간 되면 수업 들으러 갔다오는 적당한 행동반경에서 매우 안정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인간 관계로 쓸데없이 마음 쓸 일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때로는 설계 욕심에 타 남녀공학 작업장 문화가 무지하게 부럽기도 했다. 그들은 선후배끼리 작업장을 구해 같이 소규모 건축 공동체를 이룩하여 공모전을 응모하는 등 교류가 활발하다고 들었다.
반면 나는 학교를 다니면서 사석에서 선배, 후배라는 용어를 쓴 적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적어도 나 때는) 선배가 아니라 ‘언니’라고 불렀다. 학번이 다른데 나이가 같으면 대체로 고학번 쪽에서 선뜻 편하게 부르라는 제스처를 취해줬다. 복학하는 선배와 같은 설계 스튜디오를 수강하게 되면 한 학기 후 그 선배는 ‘친한 언니’가 되어 있었다. 권위주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편한 분위기에서 학교 대선배들과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이런 학교 문화 덕분이었다. 졸업을 하고 나서야 건축사 자격시험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두고 학교 선배와 으쌰으쌰 하다 보니, 만족스러웠지만 못내 아쉬움이 있었던 대학교 시절이 떠오른다. 그렇지만 이렇게 졸업 후라도 만나서 뭔가를 같이 할 수 있음을 기뻐하기로 했다.
모임 시작 2년 후, 나는 언니들보다 먼저 건축사를 따게 되었다. 두 언니는 내가 없는 모임을 1년 반 넘게 더 지속하다가, 다행히도 두 명 모두 같은 시기에 건축사 자격을 마침내 획득하였다. 특히 이 모임을 처음 기획했던 주연언니는 오랫동안 저조한 성적에 머물던 1교시 2과제인 대지 조닝 및 분석을 끊임없는 노력 끝에 가뿐히 만점을 받았다. 나한테 빌려갔던 제도판도 반환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언니가 합격한 뒤 우리는 이태원에 만나 기쁨의 양고기를 뜯었다.
우리 셋은 지금도 가끔 잊을만 하면 모임을 갖는다. 셋 다 여전히 진지한 건축인이기 때문에 일 얘기 건축얘기, 그리고 다시는 절대 공부하고 싶지 않다고 몸서리를 치면서 수험시절의 추억을 회상한다. 우리는 모두 스터디모임 결성을 공부하면서 제일 잘 한 일로 꼽는다. 어느 날 회동에서 주연언니는 말했다. 라이센스를 따서 지금 생활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모른다고. 더 이상 로컬 건축사사무소에 고개를 조아리지 않아도 되고, 자신이 미숙한 법규나 관련 행정을 그들에게 안내를 받을 때 친절한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조소를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잡지에 실린 내 작품에, 내 회사 이름을 걸지 못하는 슬픔에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고. 우리는 처지가 비슷한 미물들이었지만, 서로를 발전시키기에는 매우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