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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또 다시 건축인들은 모이고

0.2 학원


수많은 변호사들을 거쳐 가는 자습실 출근길



직종이 같은 사람들이 상당한 돈을 치루고 집합하여 앞에 칠판 바라보며 수업을 듣는 풍경은 항상 이상할 정도로 익숙하다. 꼭 스무 살 내내 갇혀 지냈었던 노량진 재수학원에서의 재수 없는 풍경이 떠오르기도 한다. 어쨌든 나랑 비슷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부대낄 때면 묘한 느낌이 든다. 이 수 많은 사람들 중에서 혹시나 반가운 동료를 오랜만에 만나게 될까 하는 기대감도 드는 반면에, 아무도 날 알아보지 못한 채 군중 속에서 영원히 숨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길지 않은 경력 동안 대한건축사협회에서 주관하는 교육 여러 가지를 들어봤다. 친환경 교육과 해체감리 교육과 같이 스스로 적극 신청한 것도 있었던 반면에, 들어야 한다길래 뭔지도 모르고 바쁜 와중 쫓기듯 들은 강의도 있었다. 건설기술진흥법에 따르면 기본 70시간의 의무법정교육을 들어야 건설기술인의 등급을 하나씩 레벨업할  있다고 한다. 자격증을   35시간의 교육을 더 신청하여 온라인으로 틈틈히 수강했더니, 마치 한우 특등급 딱지가 붙듯  건설기술인 등급도 특급으로 올라갔다. 그러나 초급일 때와 특급일 때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차이가 없다. 수업  듣는다고 건축인의 전문가적 역량이 발전할  있을까? 특급이    삶에 실질적으로 역량을 키울  있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것도 딱히 아니었다. (그런데 특급을 유지하려면 3년마다 35시간의 교육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 아무튼 소몰이 하듯 이것저것 교육하고 관리하려는 노력을 보면 그들에게 설계쟁이란  미덥지 않은 미숙한 존재인가 보다. 죄송합니다. 모든 공정을 거친 청정산 특등급 한우이지만 이상하게 맛이 없어요. 그대신 소처럼 일하는   합니다.



의도가 어찌되었든 의무교육 자체는 나쁠 것이 없다. 나는 원래 틈내서 쓸데없이  배우러 다니고 하는  좋아하는 편이다. 문제는 내가 억지로 들었던 것이든 필요해서 들었던 것이든, 건설기술원과 건축사협회에서 기획하는 교육은 하나도 빠짐없이 지루다는 것이다. 수강생도 수강하라니 듣고, 강사도 강의하라니 하는  모두 영혼이 없는 피피티   장의 슬라이드 쇼였다.  30% 정도의 유익한 정보는 70% 지루함을 이겨내지 못했다. 듣고나서 수업 내용이   톨도 남아있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강사들의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만약 내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당장 유튜브를 시작할  있었을텐데. 그랬다면 30% 유용한 정보와 70% 말초적인 자극을 추구하는 채널로 성장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아직까지 세상은 나같이 입만 살은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활짝 열려 있는  같다.




a boring class. 건축인들이 모여 의무적으로 40시간 듣는 교육 도중에 나는 또 집중력을 잃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서울에는 건축사 시험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딱 세 곳 있다. 교대역에 있는 K학원과 D학원, 양재역에 위치한 H학원이다. 어디가 종합적으로 더 월등한 곳이 있다기 보단, 각각 학원의 간판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강의가 인기가 높은 정도이다. 학원마다 수강료나 제공하는 편의 시스템 그리고 시설이 약간은 달라서 대체로 본인 성향과 기타 여건에 맞는 곳으로 선택하는 것 같다. 실무경력이 시험 자격의 최소 요건인 3년을 채워갈 무렵, D학원 H강사의 종합반을 다녀보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이제 슬슬 시험 준비는 해야할 것 같아 불안하나 마음에 신청하긴 했으나 정작 공부할 의지는 눈꼽만큼도 없었던 때였다.



 과정인 작도반부터 들었는데 수업 자체는 괜찮았었다. 다만  H선생님이 다소 적극적으로 수강생을 스터디 그룹으로 엮어주려 노력하신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갑자기 선생님이 분주히 강의실을 돌아다니며, 같이 점심도 먹고 그룹 결성하라며  뒤로  명씩 짝지어 주는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뜨거운 순대국밥을 먹어야만 했던  뻘쭘함은 고통스러웠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게다가  남자분들은 뜨거운 국밥을  이렇게 빠르게 먹는 것인가. 나는 얼얼한 혀를 겨울 공기에 식히며 말없이 돌아왔다. 안 그래도 공부하기 싫었는데 이참에 좋은 구실이 생겼으니 남은 수강료를 환불 기로 했다.



그 후로 시간이 지나 다시 정착하기로 마음 먹었던 곳은 K학원의 K선생님 종합반 강의였다. 이 강의 코스의 아주 큰 장점은 선생님의 ‘친절한 상담 서비스’라고 할 수 있다. 듣기로는 질문하러 온 수강생에게 ‘어, 그것도 아직 몰라?’하고 나무라는 강사도 있고, 스파르타 교수법을 홍보하며 다 큰 어른 수강생들을 혼내는 강사들도 있다고 들었다. 그런 분한테 수업을 들으면 나 같은 쫄보는 모르는 부분을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고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할 것이다. 도대체, 건축학과 5년 동안 교수님께 깨지고, 취업해서 상사한테 깨지고, 주무관한테 깨지고, 또 심의위원한테 깨지면서 실무 경험을 쌓았을 사람들이, 비싼 돈 내고 뭣 때문에 거기까지 가서 왜 또 혼나야 하는 지 어리둥절하다. 언젠가부터 누군가를 혼내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모두의 꿈이 되어버린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다. 가스라이팅은 나만 당할 수 없다. 나도 언젠가는 꼭 트집을 잡고 혼내는 사람이 되어 이 갑질 문화를 고스란히 되물림하는 당당한 사회의 일원이 되겠다.



꼬불꼬불 지렁이 무늬 암면흡음텍스의 낮은 천장고. 사람이 꽉 차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다. 내가 K학원을 선택했던 이유는 강의실이 아주 조금 더 컸기 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이제 마음을  잡고 건축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결정하면서, 나는 투입할  있는 모든 시간을 공부에 올인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시험 100 앞둔 5 , 그간 몸을 담았던 프로젝트의 마감을 끝으로 회사를 퇴직했다. 학원 종합반은 이미 12월에 개강하여 주말마다 수업을 다니고 있었지만,  상태로라면 회사일과 공부를 절대로 병행할  없다는 것이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당시 나는 해외 프로젝트의 인허가와 실시설계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달에  세번 타국 허가청과 협력업체와의 협의를 마친  새벽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면 여지없이 납품 일정이 우릴 기다리곤 했었던 바쁜 일상을 보냈었다. 그래도 호텔 방에서 숙제  장이라도 풀어보겠다고 A3사이즈의 휴대용 스테들러 제도판을 바리바리 들고 다녔지만 펼쳐보지도 못한 숙제는 점점 쌓여만 갔다. 나는 무르익지 않은 경력을 결국 잠시 멈추기로 결정했다.



당시 남편은 대학원이라는 무시무시한 곳에 갇혀 고학력 노예를 자처했었기 때문에 고정수입이랄 게 딱히 없었지만, 내 퇴직금으로 둘이서 어찌어찌 아껴 살면 몇 달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직장인이 아니었지만 직장인 코스프레를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주중에는 꼭 출퇴근을 하듯 학원 자습실에서 하루 기본 8~10시간 공부를 했다. 보통 한 교시 문제를 풀고 작도까지 완성하고 답안 점검하려면 4시간은 소요되는데, 하루에 최소 8시간은 책상에 앉아 있어야 문제를 1 혹은 2세트를 풀고, 나머지는 오답노트나 이론을 차분히 정리할 수 있었다. 출근하는 기분으로 자습실에 입실하고, 개방 시간이 끝날 때까지 공부하다가 퇴실하는 일상을 보냈다. 밤 늦게까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고 사무실을 퇴근하는 (더러운) 기분으로 그렇게 첫 한 달을 보내니, 그간 회사를 다니느라 몇 개월 밀렸었던 숙제는 어느새 다 풀어져 있었다.



건축사 자격시험은 국가공인 시험 중에서도 제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시험이다. 처음 시험을 보는 사람은 세 교시를 모두 봐야하므로 9시간 동안은 꼼짝 않고 문제를 풀어야 한다. 중간에 점심시간과 쉬는 시간도 있으니 시험을 다 치르고 시험장을 퇴실하면 늦가을의 하늘은 이미 깜깜해져 있다. 두 시간 짜리 토익을 매우 집중해서 풀고 나와도 진이 빠지는데, 체력의 피크가 한참 지난 나이에 하루 종일 손도면을 그리는 작업을 하려니 얼마나 고된 일인가. 그리고 매주 주말 하루를 온전히 바쳐 10시간 반 동안 학원 수업을 듣는다는 것 역시 일상에서 굉장히 높은 체력과 정신력을 요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건축사 자격시험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모두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학원 서비스를 이용한다. 문제풀이의 프로세스를 체화하여 한 과목 당 3시간이라는 긴 수험 시간을 잘 운영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프로세스의 체계를 학원 교육만큼 잘 안내하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학원에서 가르치는 문제풀이 과정의 체계를 익히지 않고, 멋대로 겅중 뛰어넘거나 주먹구구 주섬주섬 풀게 되면 전체 호흡과 스텝이 엉망이 된다. 답안을 도출하는 트레이싱지에는 모든 과정이 명료하고 보기 좋게 정리를 해야 한다. 풀다가 오류가 생긴 지점으로 다시 후퇴해야할 경우가 자주 발생하는데, 종이가 지저분하니 스텝도 지저분하게 엉키는 것이다. 각 과정을 정리하여 시간을 잘 운용하고 완도하려는 훈련. 그나마 이 방향을 준수하려 했기 때문에 첫 해의 성과가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프로세스를 체화하는 도중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들이 있다면 즉각적으로 학원의 상담서비스를 이용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건축사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교육의 도움을 받을  밖에 없다. 학원이 너무 지긋지긋하고 이미 문제풀이의 프로세스가 체화된 장수생분들은 혼자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겠으나, 처음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사교육 외에 제공 받을  있는 컨텐츠가 (유튜브를 제외하고는) 거의 전무하다. 공부를 하다보면 언제든지 필요할  상담할  있는 멘토 혹은 가이드가 필요한데 현실적으로 이런 서비스는 오프라인 학원 아니면 제공 받기 어렵다. 온라인 강의는 선택 폭이 좁은 편이고 같이 적당히  맞출  있는 스터디 메이트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런 현실들을 곱씹어 보면 나는 비교적 안온하게 수험 환경을 조성할  있었던  같다. 학원 생활도 그냥 저냥 만족하는 편이었고,  좋게 스터디메이트를 만나 외롭지 않게 완주할  있었다. 무사히 수험 생활을 마친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임을 새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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