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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손도면의 즐거움

2. 평면설계-3

2교시 평냉을 제일 좋아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확실히 나는 2교시가 제일 재미있었다. 1교시나 3교시를 공부를 하다가 2교시 평면 문제를 풀다보면, 그나마 설계 가까운 것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트레이싱지에 그린 계획의 얼개를 토대로 답안지에 작도를 시작하다보면, 얼기설기한 레이아웃이 갖춰야할 정보들을 차곡차곡 담아내면서 점점 한 건물의 평면다운 모습을 갖추게 된다. 가로 세로로 그은 가선을 바탕으로 창문의 위치를 주시하면서 구조체와 마감선, 그리고 내부 벽체를 그린다. 프리핸드로 창문과 내부 문으로 벽선을 매듭짓고 치수, 실명, 축선을 꼼꼼히 기입한다. 특히 마감이 몇 분 안 남은 시간 동안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고 공용부분의 바닥 패턴과 가구 집기 및 조경 표현 등 얇지만 힘 있는 프리핸드 선으로 여백을 채워주면, 한층 더 밀도가 있어보이는 도면 전체가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때 희열이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이렇게 열심히 작도를 하다보면, 정성껏 그린 손도면을 청사진으로 찍어 그 도면으로 건물을 지었던 윗세대 건축인들이 떠오른다. 그럼 그 단상에서 좀 더 몰입하여, 내가 80년대 서울의 한 설계사무소에서 저녁이 깊도록 도면을 그리는데 열중하고 하고 있는 한 젊은 건축가가 되었다는 상상을 해 보는 것이다. 그는 비록 일 년 중 정시 퇴근하는 날이 몇 번 없을 정도로 회사의 지박령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자신의 일을 무척 좋아했던 청년. (현실을 묘사하는 것 같은 느낌은 무시하도록 한다.) 가끔은 이렇게 상상 속 설정에 몰입해야 집중이 가능할 때가 있다. 나는 유튜브에서 각종 ASMR을 틀고 작업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특히 처마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모닥불 소리를 자주 애용한다. 사람들이 가득한 자습실에 이어폰을 꽂고 빗소리와 불소리를 들으면 신기하게도 도면이 더 잘 그려진다. 비 내리는 날 화로를 피운 움막에 둘러 앉아 도구와 넝마 따위를 정비하고 그릇에 그림 장식을 하며 내일을 준비했던 그 장인정신의 감성을, 십 만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DNA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학교 시절부터 손도면에 근거 없는 자신이 있었다. 손도면은 저학년 전공 수업 중 몇 시간 정도 밖에 배워본 적 없지만, 그려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되면 이상한 자신감에 차서 즐겁게 그렸던 기억이 난다. 어쨌든 그림과 모형처럼 손으로 만들어내는 것이지 않나. 아마 일정치 않은 울퉁불퉁한 선으로 스케치하듯이 그렸을 것이니, 결과물을 딱 봐도 도면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흉내낸 것이 눈에 보였을 것이다. 도면을 그릴 땐 한 번에 일정한 두께의 선을 그어내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에, 맨 처음 손도면을 시작하기 전에 위계가 다른 4개 혹은 5개의 선을 번갈아가며 그어내는 훈련을 한다. 도화지를 4사분면으로 구획하여 각각 수평선, 수직선, 대각선 양방향으로 그어가며 채운다. 건축사 학원에서도 그 기나긴 종합반 과정의 첫 수업은 꼭 이런 선 긋기 훈련부터 시작한다. 선 연습이 중요한 건 알겠지만 막상 시작하려하면 이제 막 뎃생을 시작하려하는 초등학생 미술 숙제 같아서 너무 낯간지럽다. 수업이 끝나면 똑같이 한 번 더 하라고 숙제를 내주는데, 혼자 살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가족들과 같이 살고 있다면 조용히 방문 닫고 숨어서 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손도면이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남는 시간에 프리핸드로 상세도면 아무거나 베껴서 그려보곤 했다. 베끼는 도면의 내용이나 의미는 몰랐다. 이것이 좋은 디테일인지, 가격이나 품이 많이 들어가는 편인지, 아니면 으례 시공사에 맡기면 알아서 공사하는 일반적인 것인지, 어떤 하자가 생길 가능성이 있는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었고 심지어 이것이 중요한 상세도인지 아닌지조차 몰랐다. 그런 것들은 대체 어떻게 알아갈 수 있는지도 몰랐다. 생각없이 그렸기 때문에 반복해서 그려낸들 의미를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면을 손으로 풀어 그리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회화에서 그려지는 대상에 따라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으로 나뉘고, 그리는 스타일에 따라 뎃생, 크로키, 수채화, 유화 등으로 나뉘는데, 나는 마치 예술의 한 장르로서 도면을 바라보길 좋아했다. 도면은 그만의 정확한 규율이 존재하고, 그 규율이 빚어내는 고유한 미감이 있다. 나는 때때로 웹상에서 옛 건축인들이 그린 손도면이나, 현대 건축가들이 독특한 스타일로 작성한 캐드 도면을 마주하게 되면 순간 두근거림을 느끼며 나만의 클라우드 폴더에 수집해놓는다. 도면은 그 자체로 매력이 넘치는 장르이다.






나는 새해마다 업무용 노트를 사서 한 해 동안 이것 저것 업무에 관련된 낙서들로 가득 채우길 좋아한다. 독일 디테일 잡지를 뒤지다가 마음에 드는 건물의 상세도, 회사 서버의 도면 레퍼런스, 그리고 마주 앉아 회의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그리기도 한다. 업무노트의 장이 채워질 수록 뭔지 모를 충족감에 기분이 좋아져서 웬만하면 마지막 장까지 채우기 위해 신경쓰는 편이다. 몇 년 전부터 연말이 되면 노트의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넘기는 영상을 찍었는데, 이젠 이런 영상을 남기는 것이 지난 해를 떠나보내는 일종의 나만의 의식이 되었다.



위의 몇 가지 실내재료 마감상세도는 5년차 때 업무노트에 그린 것이다. 원형 포맷에 그리니 나름 그래픽적인 미학이 있어, 여기다가 문구를 곁들여서 엽서로 팔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었다. 메리크리스마스나 해피뉴이어는 너무 식상하고, 평소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주변 사람에게 뜻 깊은 메세지를 보낼 수 있는 정도면 좋을 것 같다. 가령, '단열이 두툽하게 깔린 최하층 바닥같은 연말 되세요.' 라던가, '마감재는 내 마음속에 지정'... '악세스플로어라도 깔아두지 않으면 오니쨩 내게 관심도 없는걸?'



그만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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