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단면설계-1
건축사 자격시험을 합격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의 점수가 100점 만점에서 60점 이상을 획득하면 된다. 거의 아무것도 몰랐던 수험 생활 초기에는 솔직히 이 커트라인을 만만히 봤었다. 어렸을 때부터 내신이니 수능이니 숱하게 시험 공부를 하면서 60점이라는 점수를 한 번도 목표로 한 적이 없는데, 숫자만 놓고 보면 그렇게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하는 게 이해가 안 갔던 것이다. 그리고나서 몇 주 지나지 않아 현실을 깨달은 나는, ‘뭐든 젠장 60점만 넘기고 이 빌어먹을 시험을 빨리 끝내버리자’라고 급히 생각을 고쳐먹었다. 3교시를 공부하는 마음가짐 역시 비슷했다. 보통 60점으로 배점되는 단면설계에서 40~45점, 또 40점 만점인 구조계획에서 20점 언저리를 받아 합격하는 것이 이 과목의 목표였다.
훗날 내 3교시 시험 결과를 확인했을 때, 등골에 식은땀이 쫙 나면서 순간 오싹해졌다. 단면설계와 구조계획 합계 점수가 딱 60점이 되어 턱걸이 합격을 한 것이었다. 더 기가 막혔던 것은 단면과 구조 각각 과제의 점수였는데, 단면은 60점 만점에 54점으로 상당한 고득점을 한 반면에, 구조는 40점 만점에 6점으로 개인 기록상 역대 최저의 점수를 득한 것이다. 만약 단면에서 점수가 1점이라도 깎였으면 시험을 다시 한 번 준비해야하는 것 아닌가. 단면 점수 자체는 훌륭한 편이었을지는 몰라도 결국 불합격이니 말이다.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지고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불쑥 튀어 나온다.
결과만 보면 나는 완전히 단면에 승부를 건 사람의 점수 같지만, 사실은 구조 공부도 못지않게 열심히 했었다. 평소 공부했던 정성만 생각하면 최소한 20점은 넘길 수 있으리라 기대하기도 했다. 휴먼 에러 그 자체인 건축사 자격시험 결과를 아무리 예측하기 힘들다지만, 그래도 최대한 보수적인 기준을 갖고 대략적인 결과 범위는 가늠할 수는 있다. (그러니 학원 강사가 학생들 숙제에 가채점을 내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구조 시험 결과에 경악했던 이유는 애초에 예상했던 그 범위를 벗어나도 너무 심하게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구조계획에서의 전례없는 부진에도 불구하고, 단면설계가 날 재시험의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준 셈이 되었다.
지나와서 보니 이 3교시의 요상한 점수는 자기성찰을 하게 한다. 이 과목에 대해 다른 건축인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내 자신이 다소 모순적이고 비겁하기까지 한 면이 있다는 걸 자꾸 깨닫게 된다. 좋은 결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순전히 내 피나는 노력 끝에 성취한 것임을 은연 중에 강조하고 있다. 단면설계만 해도 그 황홀한 성취를 생각하면 머리 속에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그 고된 작도 훈련만이 날 구원했다’며 자기 감상에 빠져 눈물을 짓고 싶어진다. 과정을 미화하고 영웅담처럼 만들기에 이렇게 딱 좋을 수가 없다.
반면에 저조한 결과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아닌 외부에 그 책임을 적극 물어 늘어지고 있다. 구조계획 시험에 대해 누군가와 이야기 하게 되면 나는 꼭 빼먹지 않고 내 점수를 박하게 준 대한건축사협회 욕을 뒤지게 한다. 아까 전까진 단면설계에 잔뜩 의기양양해 있다가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다니기 바쁜 이 아이같은 면모를, 이제 내일 모레면 불혹인데 왜 아직까지도 이렇게 소중히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런 성찰도 소용 없는 것이, 시험을 본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건만 내 구조계획 점수 생각만 하면 아직도 단전에서 뜨겁게 무언가 끓어오른다.
이처럼 자기 기만의 위험이 마음 속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와중에, 나는 어쩌면 또 다시 우매함의 봉우리에 올라서서 내가 했던 방법에 대해 침을 잔뜩 튀기며 설파하려는 우를 저지르려는지 모르겠다. 3교시 시험을 마친 지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벌써 4년이 되었다.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주변인들로부터 귓동냥으로 듣기에는, 그 사이에 출제된 단면설계 문제들은 내가 4년 전 풀었던 것과 그 경향이나 난이도에서 들쑥날쑥한 차이가 있는 것 같았다.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당시 내가 공부한 방향이 시험장에서 조우했던 문제와 아주 운 좋게 ‘궁합’이 맞았다는 것이었다. 내 공부 방향이란 것도 나만의 고유한 분석이나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순전히 학원에서 제시한 가이드를 있는 그대로 해본 것이었다. 물론 그 가이드 자체는 상당한 연습량을 가정하고 있었다.
학원에서 공부 가이드를 제시하면 나는 일단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르려 노력하는 편이었다. 1교시 배치계획을 공부할 때는 학원의 모든 가이드가 내 성향에 맞지는 않았으나, 웬만하면 다른 과목들에서는 그 방법론이 잘 작용했다. 특히 단면설계에서 충실히 따랐던 학원의 가이드는 좋은 결과로 잘 이어졌다. 나는 이것을 ‘궁합이 맞았다’고 본다. ‘궁합’이라는 이 뭉뚱한 표현은, 매해 출제 경향이 반영해야 하는 건축사 양성 및 교육 철학 부재에 대한 의심과 휴먼에러로 가득한 시험 채점 과정에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비롯된다. 건축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동의하는 보편적인 척도와 객관성을 바탕으로 전문가의 자격을 판가름 지어야 할 국가 자격증 시험 제도에 고작 그런 비과학적인 표현을 쓸 수 밖에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건축사 자격시험의 기출문제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풀면서 종종 의아함을 느끼곤 했는데, 시험의 출제 경향과 스타일이 지난 12년 동안 커다란 일관성 없이 다소 들쑥날쑥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의아함을 내가 임하는 시험장에서는 되도록 느끼지 않게 해달라는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실전에서는 의아함을 훌쩍 넘어 공황이 찾아오기도 했다.) 그 전 기출 문제들에 의지해서 스타일과 방향을 재단하고 공부 전략을 잡다가, 시험날 예상치 못한 것들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기지를 발휘해 운 좋게 헤쳐나갈 수 있으면 그만한 다행이 없겠다. 반면에, 위기 상황에서 발현되는 나만의 어떤 기질이 그간의 노력과 상관없이 결국 방해 요소로 작용할 수도 있는 일이다.
혹시라도 안 맞을 궁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그저 내 앞에 매주 주어지는 문제를 다 풀어내는 수 밖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