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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레가토의 삶을 위하여

3.1 단면설계-3

진부한 이야기 같지만 손도면은 인간의 다른 여느 창작물들이 그러하듯 작성자의 성격을 말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내 도면은 언제나 더러웠다. 2년간 시험 공부를 하면서 작성한 답안 중 단 한 장도 깨끗한 도면이 없었다. 연필가루가 제도판 자나 손날에 쓸려 묻어 종이가 자주 오염이 되었던 것인데, 작도를 하기 전 항상 알코올로 제도판을 청소하고, 중간 중간 일부러 신경을 써가며 손을 자주 닦아도 봤지만, 내 도면은 꼭 늘 어딘가 더러워져 있었다. 학원 선생님이 도면을 검수하면서 종종 빨간 펜으로 ‘오염에 유의하세요.’라고 답안지 귀퉁이에 애써 적어 주시곤 했으나 끝내 청결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저런 노력을 해도 발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막바지엔 결국 스스로 최면을 걸며 정신승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단지 도면을 더럽게 잘 그리는 것 뿐이라고.



비록 도면의 오염은 많이 개선되지 못했지만, 그 외 작도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끌어올리도록 신경 썼다. 시간이 지나니 선도 많이 좋아졌다. 이전엔 마감에 쫓겨 얇은 선이나 프리핸드 끝자락이 휙휙 날아가버리는 경향이 있었는데, 끝나고 다시 도면을 살펴보면 그림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다소 흐트러진 것이 도면 작성자의 정신 상태를 꽤나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선을 그을 때 선 하나 하나 제대로 매듭 짓겠다는 의식을 살짝 담아 주의해가며 그려냈더니 전체적으로 그림이 훨씬 나아지고 내 마음에도 들었다. 학원의 가채점이긴 했지만 선의 개선이 답안 전체 점수로 현저히 반영되는 것도 보였다.



굳이 또래 세대에 비교하면 내 자신이 손도면을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물론 세상에는 건축에 미쳐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널려 있기 때문에 이들에 비하면 나 정도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건축사 자격시험을 수도면 작성으로 응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당연히 찬성하지 않는다. 직접 도면을 손으로 작성하면서 쏟아내야 하는 체력 및 정신적인 수고와 구질구질한 정성이 시험의 주요 평가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단 1초 안에 규모검토를 하는 AI가 인간을 위협하는 무시무시한 시대에 아직도 매해 6000명이 넘는 건축인들이 장원급제를 바라며 10시간 동안 고등학교에 박혀 수도면 작성을 하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으면 참 기분이 묘해진다. 안타까움도 있지만 한 편으론 고통분담에서 오는 안정감도 또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다. 이 순간 6000명이 같이 괴로워하고 있다.’ 라는 동질감.



손도면을 그린다는 것은 분명 고된 일이다. 두 과목만 연속으로 풀어도 온 몸에 힘이 소진되어 손끝이 무릎 관절이 바들바들 떨리곤 했다. 시간 내에 완도를 하지 못했던 시기에는 하얀 제도판만 봐도 가슴이 답답해지기도 했다. 하루 8시간에서 10시간 공부하는 자습실 생활을 시작한 후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작도라는 행위에 아마 겨우 익숙해졌을 것이다. 다행히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최종적으로 그려야 하는 목표 이미지의 선명도가 점점 높아졌는데, 언젠가부터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그려나가야 할 지의 순서도 머릿 속에 또렷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단계가 되자 인간 프린트기로 빙의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학원 수업 점심시간에 애용했던 맥도날드.



아주 처음 작도 훈련을 시작했을 때는 선을 하나하나 그릴 때마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잠시 멈추곤 했었다. 들숨 날숨따라 선도 들쑥날쑥 해질까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숨 쉬는 것까지 의식을 하면서 문제를 풀고 나면 완전히 탈진을 해버렸다. 당연히 그 다음 공부를 이어갈 여력이 전혀 없으므로 매우 긴 휴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프린트기 비스무리하게까지 숙달이 된 후에도, 처음 지문을 읽기 시작할 때는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되어 두 허벅지에도 힘을 단단하게 주게 된다. 그러다 트레이싱지 위에 답안이 정리가 되면 몇 초 동안 앞으로의 공정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가선을 다 그리고 보(Girder and Beam)와 바닥이 꺾이는 부분을 프리핸드로 그리고 나면 하얗기만 하던 종이에 어느 새 공간에 대한 힌트가 많이 주어져있다. 고민의 여지도 대폭 줄어든다. 그렇게 본격적으로 달려들어 위에서부터 가로선을 차례로 긋다보면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 무념무상이 될 때가 있다. 마치 명상과 가까운 것에 빠져있는 것이다. 경직된 근육은 어느 새 풀려있고, 호흡도 편해져 있다.



생각해보니 캐드로 도면 작성을 하면서 몰입을 할 때라던가, 피아노로 하논을 연주하며 손가락을 풀 때라던가, 마라톤 페이스로 짧은 달리기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로 정확히 같은 지점에 종종 돌입하곤 했다. 가끔씩 명상이란 걸 해보겠다고 작정하고 눈을 감고 앉아 있으면 이것이 시방 명상인지 침상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대부분이었는데, 오히려 단순한 동작으로 몸을 쉴 새 없이 쓰면서 ‘질 좋은’ 무념무상의 시간을 보냈던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목표나 성취를 향해 삶이 불안하게 매몰되는 와중에, 이완의 순간은 신기하게도 내 마음 속 시야를 더 명료하게 해주곤 했다.



사실 잡념에 허우적 빠져 보낸 날들도 물론 많았다. 특히 직전까지 다녔었던 회사에서의 생활이 불쑥불쑥 자주 떠올랐다. 나는 일머리가 그닥 뛰어나지 않는  중독자인데, 3년차에 PM 맡았을 때는 모자란 능력을 어떻게든 체력으로 땜빵하느라 회사  찜질방에서 쿠폰을 찍어가며 미련하게 애를 썼었다. 그러다가 문득 공허함이  채워진 하루를 가끔 비집고 들어오곤 했었는데, 업무노트에 늘상 하던 손도면 낙서를 하면 평소엔 달래지던 마음이  날은  풀어지지 않는다. 그럴 때는 대충 일을 마무리하고 편의점에 들려 불닭볶음면과 제로 콜라를  들고 집에 들어갔다. 불닭볶음면은   없이  위장을 때리고 대뇌를 뎅뎅 울리며 잠시라도 우울한 틈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훌륭한 식사를 마치고 나면 이어폰을 끼고 디지털피아노 앞에 앉아 얼얼한 속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하논  장을 폈다. 그리고 1번부터 연주해나가는 것이다. 우습고 이상하지만 그게 스트레스를 푸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보통은 느린 레가토로 1번에서 39번 스케일 연습곡까지 연주하기도 하고, 혹은 10번에서 20번 대까지의 곡의 음을 여러 붓점을 두어 반복 연습하기도 한다. 작은 수첩에 바를 정자를 그어가며 레가토, 앞당김음, 뒷당김음, 스타카토 순으로 반복해서 쳤던 그 노가다의 기억을, 어렸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녀봤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것이다. 피아노를 처음 시작하는 초보나 하는 훈련이라고 옛날에는 생각했었는데, 많은 피아노 전공자들도 하루의 시작을 하논 손가락 훈련으로 시작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실제로 이렇게 열 손가락에 붙은 근육에 골고루 자극을 주고 나면 미미하지만 소리가 조금 달라져있다. 아까 전에 쳤던 레가토보다 조금씩 빨라져 있고 더 부드럽게 이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럴 때면 내 불안도 조금 누그러지곤 했다. 몸은 퇴근했지만 아직 나를 휘감고 있는 회사일을 둘둘 풀어내고 싶을 때나 혹은 여러 고민으로 번잡한 날에는 나는 종종 피아노 앞에 앉았다.



아마도 그 때의 나는 겨우 스트레스를 푸는 수준의 거칠고 심지어 어쩌면 폭력적일 수 있는 태도로 피아노를 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일방적인 피아노를 치는 와중에도, 피아노가 삶 그 자체인 사람들이 문득 떠올랐다. 그러면 그들의 하루를 상상해보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세밀함을 구현하기 위해 이들이 해나갔던 묵직하고 고된 연습에 대하여, 힘 없는 소리를 내기 위해 이들이 오늘도 들여야 했던 힘에 대하여. 그리고나서 어제 오늘 마주했던 내 주위의 숙련자들을 생각한다. 지금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명확히 응시하면서 레가토로 매끄럽게 처리해 나가는 안정적인 기술자들.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렇게 피아노 앞에서 앉았던 3년차 때의 내 의식은 다시금 하얀 제도판을 마주하고 있는 현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제도 샤프를 쥔 손가락들의 근육을 조금씩 꾸물거려 본다. 몇 줄기 안 될 것 같은 내 얇은 정신의 세근육은 어제보다 조금은 더 강해져있을까. 나는 과연 언제쯤 내 일에 능숙해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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