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평면설계-2
누구나 첫 시험은 허둥지둥 준비하게 되는 것 같다. 말이야 세 교시지, 실질적으로 각각 다른 완전 별개의 다섯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첫 시험을 준비했던 그 해 100일은 정말 혼란스럽고 정신없이 보냈었다. 그래서 그 바쁜 와중에 2교시가 가장 먼저 점수 안정권에 들기 시작하는 것을 확인하고는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부족한 나머지 네 과목에 좀 더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험 한 달 전쯤이던 어느 날 잠시 시간을 내서 공들였던 정리 작업을 마지막으로, 학원 숙제 이상의 더 추가 문제를 풀거나 반복해서 푸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학원에서는 각 과목 당 일주일에 풀 수 있는 문제양을 딱 두 개씩으로 정해서 나눠줬었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주 딱 그 두 문제만 풀었다. 그 정도의 일정한 추진력으로도 60점이라는 최소한의 허들을 가볍게 넘나들 수 있다는 감각이 생겼기 때문이다. 특히 며칠 동안의 단기 프로젝트 같이 기획했던 ‘정리 작업’ 이후에는 그 허들을 관성적으로 넘는 스스로의 감각에 대해 믿음이 더욱 강해졌다.
평면설계 문제를 풀다 보면 항상 ‘여기는 고민을 좀 덜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지점이 있었다. 수직 동선 및 화장실 등의 서비스 공간 계획이 그랬다. 2교시는 꼭 출제위원의 정답을 맞춰야 한다는 압박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그럼에도 코어의 위치 설정은 점수 당락에 매우 중요해 보였는데, 일단 코어가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계획이 크게 달라지기도 했었다. 평면에서 코어의 위치를 정답 범위에서 멀어지지 않게 설정해야 하겠는데, 그 정답의 방향에 대해서는 건축사 학원마다 약간의 의견차가 있어 보였다. 나는 K학원의 답안지들을 기준으로 코어 및 서비스 공간 계획의 방법을 분석해보기로 했다. 여태까지 풀었던 문제들을 한꺼번에 살펴보면서 재정리하는 작업이고, 넉넉히 며칠의 시간은 필요해 보였다. 자습실에서 평소의 공부량을 소화하고 온 뒤, 잠을 조금 줄여가며 밤마다 책상에 앉아 정리했다. 그렇게 4일은 걸렸는데, 시험을 한 달 반 정도 앞뒀던 시기였다.
각 페이지 당 왼쪽엔 주변 영역 조닝과 코어의 위치를 나타낸 키맵, 오른쪽에는 그 키맵을 4배 확대하여 코어의 세부평면을 그림.
지문에 주어진 코어의 면적 크기에 따라 배열함. (T25, T30, T40 등의 뜻은 해당 숫자 제곱미터 면적의 화장실이라는 뜻)
크게 봤을 때는 지문 조건과 코어 위치 간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했고, 좀 더 미시적으로는 면적 조건에 따른 화장실의 대안 계획들을 미리 숙지하고자 했었다. 그래서 영역 조닝의 키맵과 세부 평면을 같이 그림으로써 코어 면적에 따라 순차적으로 정리하였다. 코어 및 서비스 공간을 계획할 때 최대한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려는 것이 이 작업의 목표였는데, 확실히 코어와 평면 세부 플랜을 짜는 시간은 유의미하게 줄일 수 있었다.
이렇게 엘리베이터와 계단 그리고 화장실의 위치가 정해지면, 설정한 공간 크기와 동선 흐름에 맞게 내부 레이아웃을 짜야 한다. 층고에 맞는 계단 박스의 크기, 엘리베이터와 설비 배관 공간, 그리고 이용자들을 맞이하는 엘리베이터 홀, 그리고 남녀 화장실 및 장애인 화장실의 입구, 세면대 위치, 소변기와 대변기를 구획한다. 실제로 공용공간에서 제일 중요한 장소가 될 수 있는 웰커밍 공간이고, 레이아웃부터 마감 재료까지 세심하게 하나 하나 고민해야 할테지만 시험을 위한 준비단계에서는 그 인간적인 마음을 많이 내려놓는다. 마치 AI가 무책임하게 대안을 뱉어내듯 재빨리 면적에 맞춰서 화장실 세면대와 칸막이를 슥슥삭삭 그려내는 것이다. 대변기 칸막이 개수가 조금 모자르거나 장애인 화장실 앞 휠체어가 회전할 수 있는 반경이 나오지 않는 것을 트집잡아, 출제 위원들이 점수를 왕창 깎을 일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밀한 계획까지 내가 ‘그렸다’는 사실이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밀도있고 꽉 차 보이는 작도를 해야 한다.
오로지 합격에만 목표를 두고 2교시를 준비했던 과정은 저연차 실무자에게 좋은 영향과 안 좋은 영향을 둘 다 끼치게 되었다. 일단 화장실 계획은 전보다 더 빨리 짤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대안도 금방 뱉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안 좋은 점은 그 화장실 계획들이 섬세하고 우아하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험을 공부하다보면 그 바탕이 되는 계획의 각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으려는 습관이 형성되기 때문에, 그 각론에 조금 들어맞지 않는 계획은 나도 모르게 배제하게 된다는 것이 매우 불편한 점이었다. 가령 코어와 화장실은 남쪽에 위치하면 안 되지만 주거 공간은 반드시 남향배치를 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시험의 이론과 각론을 무시할 필요는 없지만, 그런 강박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전체적으로 훨씬 더 좋은 계획이 나올 여지가 충분히 생기기 때문이다. 'I' 사무소에서 일할 때 마치 시험 치듯 생각없이 평면을 짜다가 소장님한테 꾸중을 들은 적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