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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고민을 해서 고민이 없어지면  고민이 없겠네

2. 평면설계-1


2018년 시험 점수 결과를 떨리는 마음으로 확인했을 때, 82.5점이라는 숫자에 굉장히 놀랐었다. 2교시 평면설계는 세 과목 중 점수가 제일 높았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공부했더라?’ 하고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려 하면 명확하게 잘 떠오르지 않는다. 2교시도 열심히 공부하긴 했는데, 다른 두 과목과 비교했을 때 그 기억의 해상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아무래도 시간을 제일 적게 투자했던 과목이라 그런 것 같다.



수험생들이 어느 과목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신기하게도 두 과목으로 크게 양분이 되는 양상을 볼 수가 있다. 바로 배치와 평면이다. 1교시는 진작 붙었지만 2교시 평면설계에서 계속 낙방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평면은 덜컥 붙는데 배치계획에 끝까지 감을 못 잡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후자였다. 80점이 넘는 2교시 점수는 나를 뿌듯하게 했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다. 여기서 10점만 떼어다가 1교시 점수에 얹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은행에 담보 대출을 신청하여 뜻하려는 목표 자금에 큰 보탬을 하듯 말이다. 그렇게 라이센스를 허용하는 대신 아마 조건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 5년 정도는 계약 관련 문서에 건축사에 대한 부가 정보를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달아 준다던가. ‘본 건축사는 배치계획 능력이 살짝 모자라는 것을 본 건축주 갑은 확인하였으며….’



만약 내게 일정 기간 동안 주홍글씨를 다는 조건부 합격이 주어졌다면, 나는 긴 고민 없이 그 악마의 낚시 바늘을 덥썩 물었을 것이다.



2018년도 시험 직후, 학원에 제공하기 위해 제출했던 2교시 답안을 프리핸드로 재현해봤다.



평면을 풀 때는 다른 교시의 과제를 풀 때와는 달리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일단 과제 하나가 3시간을 통째로 쓰는 유일한 과목이다. 달리기 종목에 비유하면 좀 더 장거리 마라톤 페이스에 가까운 것이다. 다른 과목에서는 5분 안에 끝내야 할 지문 읽기도 최소 10분은 들여 꼼꼼히 읽어야 한다. 같은 곳에 여러 번 밑줄 쳐가며 몇몇 중요한 지문 조건들이 저절로 외워지다시피 하다보면, 처음 문제에 달려들 때의 긴박감이 조금씩 잦아들고, 혼란했던 정신머리에도 산소가 구석구석 공급되는 느낌이 든다.



무엇보다 평면계획은 꼭 정답을 맞추지 않아도 돼서 부담스럽지 않다. 일단 보기에 깔끔하고 양호하게 정리만 잘 되었다 싶으면 합격권에 진입하기 쉽다. 출제자가 만들어 놓은 정답과 비슷하지 않아도, 설령 계획의 질이 좀 떨어져도, 일단 그림이 보기 좋으면 어느 정도 점수를 기대해 볼 만하다. 가령, 세미나실이 너무 세장해서 테이블을 놓을 수도 없는 비좁은 방이 되어도, 오줌을 싸는 남자의 뒷모습을 복도 끝에 있는 사람도 똑똑히 목도할 수 있게 화장실을 배치해놓아도, 미분양 사태가 벌어질 것 같은 요상한 주거 공간들을 만들어놓아도, 전체 그림의 느낌이 정돈되면 합격을 노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험에서는 적당한 그리드 안에 주요 지문조건들을 짜임새 있게 잘 정돈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인 것이 제일 중요한 채점 기준인 것 같다.



그래서 아무 고민 없이 하라는 대로 허울 좋게 꾸미면 시간 내에 잘 정리할 수 있다. 2018년 당시 내가 작성한 답안을 봐도 그렇다. 만약 그 때 문제를 잘 풀고 있다가 중간에 ‘잠깐. 외부 피난계단과 주계단이 너무 가까운 것 아냐? 제일 남쪽에 있는 실은 아예 피난거리가 안 나오는데?’라는 고민을 덜컥 하기 시작했다면 그 해 2교시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획을 다시 뒤집어 법규에 맞는 대안을 만들어 내느라, 시간 내 작도를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학교와 감옥과 건축사 학원은 빨리 졸업할 수록 좋다는 옛 현인들의 말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연차가 쌓일 수록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지만, 아는 것이 많아지니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는 갈등의 순간 또한 많아지는 것이다. 아마 ‘에라 모르겠다’하고 눈 꼭 감고 넘어가는 것에 익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오늘도 더 똑똑한 척하는 내 자신과 싸워 승리를 쟁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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