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1
자신의 회사로 놀러온 내게 그녀가 말했다. 지향언니는 친한 건축인이다. 그녀는 5년 전 강남의 한 공유오피스에서 설계사무소를 열어 운영하고 있었고, 육아휴직 중이었던 나는 아기를 남편에게 맡기고 모두가 한창 분주한 근무시간에 언니의 사무소를 찾아 처음으로 놀러갔었다. 지향언니를 알게 된 지는 이제 몇 년 안 되었지만 그녀가 그렇게 험한 말을 하는 것은 본 적이 없어(물론 평소에 욕을 달고 사는 내 기준으로는 그렇게 심한 말은 아니다.) 나는 매우 놀랐다. 마치 지구상의 모든 인류는 좆밥이라고 엄숙하게 선언하는 듯, 언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희재씨는 건축사를 땄지만 공사 감리 경험이 없기 때문에 경력이 아직 수습 단계에 머물러있죠. 나는 지금 설계하는 건물 현장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바쁘게 준공할 준비를 하고 있어요. 그러나 나는 건축사가 없기 때문에 밤낮으로 애써 노력했던 프로젝트에 내 회사명을 내밀 수가 없어요. 결과물이 좋아서 잡지에 실린다고 해도 지역 건축사 사무소 이름으로 들어가야 해요.”
다소 자조적인 한탄이 섞여있긴 했으나, 그녀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명확했다. 결국 사람은 각자의 미숙한 구석을 안고 살아가는 미물과 같기 때문에 우리끼리 보듬어 상대의 부족한 부분은 채워가면서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해야 한다는, (알고 보니) 따뜻한 인류애를 느낄 수 있었던 훈화이자 나를 향한 동업 제안이었던 것이다. 무척 고마운 일이고 조건도 매력적이었지만 무엇보다 저렇게 파격적인 문장으로 스카우트를 할 수 있다니. 가정보육 기간이 예상보다 길어지게 되어 복귀에 대해선 당분간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이지만, 저 좆밥이란 단어는 시간이 좀 지난 지금도 난데없이 불쑥 떠올라 머릿속을 헤집는다. 아주 독특하고 충격적인 마케팅에 노출된 뒤 물건을 잔뜩 구매한 느낌이다.
재야의 건축인들과 대화하다보면 이렇게 배울 것이 많다.
나는 2013년 대형설계사무소에 첫 입사하여 두 번의 이직을 거치며 7년 정도 설계업에서 일해왔다. 소규모 회사에 첫 번째로 이직하여 5년차 팀장으로 근무하던 어느 날 퇴사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건축사 시험 준비와 회사 업무를 도저히 병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백수가 된 나는 본격적으로 사무실 대신 매일 건축사 학원 자습실에 출퇴근 하는 생활을 지냈다. 그렇게 집중적으로 매달린 끝에 총 2회 고시에 걸쳐 건축사 합격증을 받게 되었다. 2018년 2교시와 3교시를 먼저 합격했고, 2019년엔 나머지 남은 1교시를 붙었다. (나는 1년에 딱 한 번 시험이 열렸던 마지막 세대 수험자였다. 지금은 1년에 2회 시행으로 개정되었다.)
한 번에 세 교시를 모두 합격하는 훌륭한 사례도 비록 소수긴 하지만 주변에 존재한다. 나는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 늘 꿈을 창대하게 꾸는데, 건축사 자격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첫 시험에 자격증을 따내는 것이 목표였다. 짧은 시간 동안 허겁지겁 공부하는 내내 불안하긴 했지만 이렇게 열심히 노력했으니 시험장에서 약간의 운만 가미되면 능히 성공할 거라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첫 번째 시험 점수를 확인하고 나서 나는 결국 무척 괴로워 할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며칠은 깊은 슬픔에 빠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지긋지긋한 시험을 또 1년을 준비해야 한다는 암담함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절망의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 며칠 간 슬퍼하면서 한편으로는 좀 어리둥절했다. 물론 한 번에 합격하겠다는 목표는 아주 비현실적이지 만은 않았고 가능성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목표의 난이도 자체는 매우 높은 편이었다. 내가 안 되면 되게 하는 특전사도 아니고 세상 모든 일이 모두 뜻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지금 나는 인생의 쓴 맛을 처음 겪어본 것 마냥 왜 이렇게 크게 좌절하는 것일까. 곰곰히 곱씹어보니, 내가 실망했던 것은 시험 결과 그 자체보다는 바로 내 자신이었던 것 같았다. 그렇다면 또 의문이 든다. 나는 대체 나에 대해 여태껏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에 대해 객관적으로 바라 보는 동시에,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은 있었던가? 사실은 나는 한 번도 나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닐까? 스스로 그런 질문들을 던지자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뱃살만 비대한 줄 알았지 내 자아도 이렇게 비대한 줄은 몰랐구나. 허울 좋게 부풀려진 자의식을 나는 높은 자존감이라고 착각했었구나. 이 허상을 오랜 세월동안 열심히도 만들어 왔구나.
그렇게 시험이 끝나고 얼마 간의 성찰 후, 구직을 하기에도, 그렇다고 일찍부터 공부를 시작하기에도 뭔가 애매한 시간이 찾아왔다. 몇 달 간은 건축 프리랜서 활동을 했고, 새해가 지나 또 몇 달 간은 (갑자기 뜬금 없지만) 중국에서 생활을 했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마음가짐을 다시 가다듬고 또 몇 달 간의 수험 생활에 돌입했다. 그 해 두 번째 1교시 시험을 치뤘다. 성적이 나오기까지 이따금 불합격하는 꿈을 꿔대는 그 긴 시간을 보내며 한 편으로는 새로운 직장에 다시 취직할 준비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밤 중 일면식 없던 S소장님으로부터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고 그 분이 대표로 계시는 아뜰리에 ‘I’건축사사무소에 들어가기로 했다.(소장님은 그 날 밤 스카우트에 대해서 훗날 ‘인터넷 충동구매를 했다’라고 표현하셨다.) 11월 초 어느 날 새벽 한 시. 그간 악몽에 떨면서 기다려왔던 합격자 명단에 내 수험번호를 확인한 뒤, 나는 홀로 남은 사무실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글을 쓰는 지금은 건축사 합격으로부터 3년이 지났다. 'I'회사를 다니다 그간 일에 밀려 미루기만 했었던 임신을 했다. 아직 전문가라 자칭하기 민망할 정도의 물경력인데 경력 단절 기간을 겪어야 하니 무척 조바심이 났다. 몸이 허락하는 최대한 오래 출퇴근을 하다가 휴직을 신청하고 첫째를 출산했다. 아이가 돌이 지나면 복직을 할 계획이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쉽지만 'I'회사에서 퇴직 수순을 밟았다. 일을 그만둔 지 1년 반이 되어가지만 나는 7년차 물경력 그대로 멈춰있다. 저연차 때 봤던 7년차 선배들은 이리저리 날고 기는 핵심 인재거나 작가주의로 빛나는 기술자들이였다. 비록 영리하지는 않아도 영치기 영차 살다보면 나도 곧 저들처럼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었다. 언제나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해 왔고 그 선택에 후회한 적도 거의 없었지만, 불안하고 조급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육아로 인해 수면의 질과 더불어 체력도 덩달아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재 어지럽게 욕망하는 것들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과 또 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한 번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시리즈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정리'일 것이다.) 떠올려보면, 당장 손이 없을 때 그간 미뤄왔던 정리를 하는 것은 늘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회사 프로젝트 마감 다음 날 하는 사무실 청소는 또 다른 일에 착수 할 수 있도록 그간 몰입했던 정신의 관성과 여운을 개운하게 걷어낸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도면을 모아서 버릴 건 버리고 다시 활용할 이면지를 추리고, 난잡해진 회사 서버 폴더와 자기가 진짜 최종이라고 주장하는 파일들이 가득한 개인 컴퓨터 배경화면도 보기 좋게 정돈한다.
이렇게 과거의 흔적을 정리하다 보면 당시의 상황들과 그로 인해 선택해야 했던 크고 작은 결정들을 짚어 나가게 되는데, 이 연대기 순으로 나열된 작은 가지들은 그 일의 종류나 중요도 등과 같은 줄기를 중심으로 묶여 마치 몇 그루의 나무처럼 새로운 형태로 분류가 된다. 하나 하나 뜯어보면 다 다르게 생긴 나무들로 보이는데, 그 군집은 신기하게도 어떤 특정한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래서 가끔 헤매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나는 곧잘 내가 심은 나무들이 어디를 향해 가리키고 있는지 살펴보곤 한다. 아무리 봐도 잘 알 수 없을 때는 나무의 수를 늘려서 그 방향성의 선명도를 높일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여느 때처럼 수첩을 끄적이던 어느 날, 나는 아직 심지 않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