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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희재 Oct 30. 2022

삼자택일의 삼십 대

0. 프롤로그-2

어제의 비대한 자아는 끊임없이 불안이라는 이름의 닌자를 파견했고, 오늘의 나는 그 놈들을 상대해 나갔다. 아침에 일어나 요가를 하거나 공원을 뛰었고, 빠짐없이 매일 일기를 썼다.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집중있게 충실히 보내는 것도 그 드글드글한 놈들을 하나씩 차례차례 처리해 나가는데 도움이 되었다. 가끔 자객 하나 정도는 숨이 붙을 정도로 살려두어 대체 누가 파견을 한 것인지 심문을 하기도 했는데, 그러면 그 자식은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 꼭 내 이름을 불었다. 그리고는 과거의 내 자신이 야심차게 공표했었던 <30대에 이뤄야 할 목표 리스트>를 외치며 장렬히 숨을 거두는 것이다.



1. 건축사 라이센스를 딴다.

2. 두 아이를 낳고 기른다.

3. 실력 있는 전문가가 된다.



생각해보면 30대에 들어설 때부터 현실과 반강제로 타협하며 삼자택일에 대한 압박에 늘 시달리며 계속 적절한 타이밍을 눈치보는 삶을 살았다. 강약과 순차를 과감하게 조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내 쪽이 무력하게 조정당하기도 했다. 실로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해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적어도 첫 출산 전에 1번을 먼저 이루는 것이 에너지 안배 측면에서 더 유리해 보이긴 했다. (3번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시방 언젠간 되겄지.) 건축사 자격을 획득하는 과정은 어쩌면 남은 두 소원과 맞먹을 정도로 긴 시간과 체력 그리고 정신력을 들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중 유일하게 이룬 건축사 합격에 대해 글을 쓰기로 했다. 지금 내가 이걸 왜 쓰고 있지 의아해하면서도 남편에게 귀여운 아기를 훌렁 던지고 집 앞 까페로 나와 2-3시간 씩 타이핑 하는 나날을 보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남에게 보여주기 곤란한 일기처럼 뒤죽박죽 써나갔다. 그러다가도 종종 글 밑바닥에서 차가운 해류처럼 무겁게 흐르고 있는 내 심리 기저를 발견하기도 했다. 최선의 균형을 위한 선택을 하면서도 혹시나 이것이 정답이 아닐까하는 두려움, 더 치열하고 효율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아쉬움,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수치심 같은 감정들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곤혹스러웠지만 이를 피하거나 멈추지 않고 기록해 나가려 노력했다.




바쁘지 않고 할 일은 없어도 매일 글을 쓰고 운동하는 나날의 일지




한 편, 어디까지나 전문 분야의 자격증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 삼자택일이라느니, 강약약강이라느니 뭘 그렇게 무겁게 생각하냐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겠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는 건축사 자격 시험을 공부하는 과정 자체가 결국엔 실무 기반을 쌓는데 있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지 않겠냐는 반문은 합리적이고 유효하다. 분명히 개업을 목표로 하거나 본인이 개업한 회사명으로 제약 없이 활동하려는 사람이라면 결정적인 도움이 된다. (원래 그런 목적의 시험이니까.) 보통 대학교 종강이 되면 일부 열정적인 학생들이 '방학 동안에 어떻게 건축을 공부하는 것이 좋은지' 설계 과목 교수님들에게 묻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면 대부분의 교수님들은 늘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행 많이 다니고 연애 많이 하세요.' 무책임하다 싶을 정도로 막연하지만 그러나 분명 진실성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같은 논리로 운전면허를 따는 것, 아르바이트를 해 보는 것, 요리를 하는 것도 다 건축 공부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하물며 건축사 시험이라고 내 건축 공부에 도움이 안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저연차 때 공부했던 입장에서 시험 공부는 분명히 실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공부 이전에 나는 법규의 체계를 잘 몰랐었고 규모검토도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1교시 과제인 대지분석 및 조닝을 공부한 덕에, 제반 법규 및 보편적인 각론을 익히기도 했고 최대 용적률을 도출하는 프로세스를 체화할 수 있었다. 또한 주어진 시간 내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마감의 정신도 한껏 배양했다. 잔디 표현을 하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점을 하나라도 더 찍으려고 콩콩 대며 손목을 불태웠던 기억들은, 어떤 숭고한 프로의 자세와 미덕에 대해서 상기시켜 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건축사 자격 시험 공부가 창의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요하는 실무에선 방해가 된다고 느낀 적도 많이 있다. 그 때 주입된 이론 및 각론과 설계 답안을 도출하는 메카니즘에서 맴돌고 있는 대뇌를 시원하게 ‘워싱’해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시험 문제에 등장하는 설계 내용과 이를 풀어내는 어휘들을 보면 스타일이 총체적으로 구식이다. 공부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하다간 이런 스타일에 익숙해져서 나도 모르게 구식의 디자인을 재생산 할 수 있겠다는 위기감이 생길 정도다. 실무에 끼치는 영향은 크게 이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건축사 자격 보유가 월급에도 영향을 끼쳤으면 좋겠다고 내심 아주 조금 바랐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첫 회 시험준비를 하면서 풀었던 답안지 모음. 과년도 기출문제와 학원 문제를 몇 번 이상 반복해서 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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