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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레네를 넘다

2023.4.27(목)

by 박달나무

셍장에서 떠나서 론세스바예스(Roncesvalles)까지 간다면 27km를 걸어야 한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이다.

20230427_2.jpg 아침의 풍광은 황홀했다

우리 아이들은 오히려 가능할 지 모르겠지만, 내가 견디기 힘든 거리다.


어제 7km만 걸었기에 오늘 20km를 걸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한 것. 아주 적절한 배분이었다. (어쩐지 어제 묵은 알베르게에 사람들이 득시글. 1km 떨어진 알베르게도 풀로 찼다고)


그런데 오늘 걸은 20km는 평지라면 30km이상을 걸은 셈이다. 우리는 아침 7시45분에 걷기 시작해서 길 위에서 오후 5시45분까지 있었다. 무려 10시간 동안 걷거나 앉아서 쉬거나 포장한 샌드위치 점심을 먹거나 론세스바예스 공립 알베르게에서 대기하거나 했다.


오전은 줄곧 오르막길이고 오후는 긴 내리막이었다. 우리는 무려 해발 1450미터 피레네를 넘어서 스페인 평야 지대로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이제 광대한 평지의 연속이다.


오늘 20km를 걸은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칭찬 받고 격려 받을만 하다. 어제와 달리 크게 힘들다 칭얼거리지 않고 배낭도 끝까지 스스로 매고 걸었다.


물론 옥의 티는 있는 법. 오전에는 작은아이가 거꾸로 달리거나 우는 일이 약간 있었고, 오후에는 큰아이가 걷기 사보타쥬(평평한 바위돌 위에 목베개를 베고 한참을 누웠다가 뒤늦게 나타났다)를 선보였다.

20230427_1.jpg 작은아이는 한국인 순례꾼 부부를 따라가겠다고 고집했다

오전에 작은아이는 유튜브 업로드용 촬영을 하자고 꼬득여서 위기를 넘겼고(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씩씩하게 걷는 모습을 전달해야하지 않겠니!) 오후에 큰아이는 아무런 잔소리를 하지 않고 아이의 페이스로 걷도록 배려했다.


그래서 성공적으로 피레네를 넘었다.

20230427_4.jpg 이제 우리는 765km를 걸어야한단다

문제는 순례꾼 모두가 론세스바예스에서 묵는다는 점이다. 한국인 단체 팀이 절반은 차지하는 것 같다(느낌상) 열 명이 산악자전거를 가지고 순례길을 주파하는 한국인 팀도 론세스바예스에서 묵는다. 알베르게든 호텔이든 호스텔이든 예약한 사람들로 이미 차서 침대가 없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줄을 섰는데, 우리 앞에서 끊겼다. 우리 걸음이 많이 느렸기 때문에 아쉽게 알베르게를 구하지 못했다. (비예약자로 알베르게에서 1시간을 기다리다가 결국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것)


6km를 더 가면 숙소를 구할 수는 있지만 2시간 가까이 더 걸어야 한다는 미션은 임파서블이다.


합승택시(승합차에 숙소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함께 이동)로 이웃 마을(여기도 론세스바예스로 부른다) 아파트 형태 호텔에 들어갔다.


어제 묵은 알베르게보다 저렴한데, 시설이 아주 좋다. 마을 자체가 동화 속 상상의 마을처럼 보인다. 음식값도 스페인이 확실히 저렴하다.

피레네를 넘은 순례꾼들이 SNS에 표현하기를 자연환경과 뷰에 찬탄하지만, 뭐 별 거 없다. 물론 매우 깨끗(깔끔)하고 공기질 최상이고 기온 적당하고 다 좋다. 그런데 나는 마치 한국의 어딘가를 걷는 느낌이다. 설악산 공룡능선 정도…. 수종도 대부분 오리나무 숲인데, 낯설지가 않다. 지층이 드러난 절벽은 피레네가 습곡에 의해 짜부러져서 생성됐고, 꽤 오래된 땅이란 걸 말해준다. 이것도 한국과 매우 유사하다.


막 꺾기 좋은 고사리가 지천이라서 어떤 코스는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느낌….


한 스웨덴 아줌마가 우리 아이들을 칭찬하고 내게 “여기 너무 아름답지 않니?” 하길래 “어디서 왔어?” 물으니 스웨덴에서 왔다고…


“니네 스웨덴이 더 멋지지 않니? 예를 들면 로포텐(Lofoten)같은….“


”로포텐? 난 모르는데. 스웨덴에 로포텐 없는데“


”아, 미안 로포텐은 놀웨이구나. 암튼 스웨덴도 멋지잖아“


뭐 이런 대화를 했는데, 이 정도(피레네) 산세에 감탄한다면, 설악산, 한라산을 왜 외국인들이 좋아하는지 알겠다.


더구나 설악산, 한라산은 바다까지 보이니 얼마나 판타스틱하겠냐구.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좀더 커서 한국의 자연환경을 사랑하고, 자연을 잘 지키고, 한국의 백두대간도 씩씩하게 트레킹하는 젊은이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주욱 걸었다.


아이들도 오늘은 힘들어 하면서 자기들이 도전에 성공했다는 뿌듯함도 보인다.


나도 아주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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