닮은 구석이 있다.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날 닮은 너

by 신지훈

오늘도 어김없이 하교 시간이 금세 찾아왔다. 날이 조금 풀려서 가볍게 입고 집을 나섰다. 학교 앞에는 다수의 엄마들과 소수의 아빠들, 그리고 태권도 사범님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처음 이런 풍경을 봤을 때는 생각보다 기다리는 어른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초등학교에 다녔던 그때 그 시절 80년대와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삼삼오오 대화중인 엄마들 곁에 덩그러니 서 있으려니 활기찬 분위기를 망치는 것 같아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제이를 기다리기로 했다.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는데도,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올 것만 같은 기분에 오늘 아침에 찍었던 사진들을 살펴보며 제이를 기다렸다. 학교 앞 놀이터에는 제법 많은 아이들이 있었다.


곧 제이가 나타났다. 며칠 전에 끝난 충치 치료 때문인지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아빠, 잠깐 놀이터에서 놀고 가면 안 돼?”

“집에 가서 양치하고 학원 가야지.”

“잠깐, 아주 잠깐.”

“어. 그래.”


아주 잠깐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제이는 어떤 것을 하고 싶을 때면 ‘OO 하면 안 되는지’ (또는 되는지) 물어볼까? 그냥 ‘OO 하고 싶다’고 말해도 되는데. 내가 수시로 무언가를 못 하게 해서 그런 습성이 생긴 걸까? 지금까지 자기 욕구를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보다 부모의 허락을 먼저 구해야 한다고 은연중에 학습시켰던 것 같다.


제이는 점퍼를 과감하게 벗어 두고 미끄럼틀을 타기 시작했다. 투명한 터널 미끄럼틀을 연신 오르내리는 제이를 보니 제법 짜릿해 보였다. 정전기 때문에 머리카락이 몇 가닥씩 바늘처럼 하늘을 향한 모습이 우습게 보였다. 놀이터에 아는 친구들은 없는 눈치였다. 그런데 유치원생 정도의 아이들이 제이가 타려는 미끄럼틀 앞으로 다가오자 눈치 보며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제이가 한발 비켜서니 다른 아이들이 쪼르륵 이어 내려갔다.


언젠가 워터파크에서 슬라이드를 타는데 뒤 친구들이 자꾸 새치기를 하는데도 제이는 가만히 보고만 있던 기억이 스쳤다. 분명히 먼저 와서 기다렸는데도 누군가 조금이라도 바짝 다가오면 계속 양보를 하는 것이었다. 슬라이드 타기가 무서워서 그런가 했는데, 나중에 보니 본인이 타기 전에 누군가 다가오면 본능처럼 비켜주고 있었다. 너그럽게 양보하는 마음이 예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손해 보는 행동 같아서 답답해 보였다. 지금이 바로 그 상황 같았다.


제이는 미끄럼틀을 뒤로하고 다른 놀이기구를 건성건성 돌아다니면서 한쪽 방향을 자주 바라봤다. 그네였다. 놀이터에서 가장 경쟁이 치열한 그네 말이다. 제이는 흔들말에 앉아서 몇 번 탄력을 즐기는가 싶더니 이내 그네로 향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손을 살짝 들어서 아는 척을 했다.


한두 학년 위로 보이는 언니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두발로 서서 거의 180도에 가깝게 그네 타기를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멀미가 날 정도였다. 제이는 옆에 바짝 기대서서 묘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음에 내가 탈게요’를 의미하는 바디 랭귀지라는 것을 아이들은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언니들은 눈길 한번 안 주고 태연하게 그네 타기를 즐겼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이들은 여전히 그네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인기에 비해 그네는 어딜 가나 항상 두 개뿐이다. 아예 그네만 있는 놀이터가 있으면 좋을 텐데.)


더 기다려 봐야 소용없어 보였다. 제이와 눈이 마주친 나는 ‘가자.’라고 입 모양만 내며 손짓을 했고, 제이는 ‘이리 와봐.’라며 입 모양만 내며 작게 손짓했다.


“왜? 이제 가야지.”

“그네만 타고.”

“근데 왜 불렀어?”

“아니, 그냥 옆에 있으라고. 잠깐만.”


야속한 언니들은 사뿐사뿐 발돋움을 하며 가볍게 그네를 탔다. 내릴 기색은 없었다. 제이의 표정을 보니 ‘잠깐 타면 안 돼요?’ 물어볼까 말까 쪼뼛쪼뼛 망설이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옆에서 말없이 기웃거리던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말 못 하고 망설이는 모습이 어쩐지 나와 똑 닮아 보였다.


“타고 싶다고 얘기 좀 해봐.”

“그냥 가자.”

“그냥 가게? 그럼 학원 마치고 다른 놀이터 가보든지.”

“…”

“아빠가 쟤네들한테 얘기할까? 같이 좀 타자고?”

“무슨 소리야. 됐어. 가. 이제.”


결국은 그네를 타지 못했다. 우리는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 들렀다. 금세 기분이 풀어져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와 닮은 구석이 많은 숫기 없는 제이를 발견하게 된 소소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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