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도 순삭

닮은 듯 다른 하루, 다른 듯 닮은 하루

by 신지훈

“여보, 할 만해?”

“뭐… 그렇지. 다 좋은데 하루가 진짜 순삭이다.”

“나이 들어서 그래. 나이 들어서.”

“참 희한하지. 회사에선 그렇게 시간이 안 가더니…”


시간이 부쩍 빨라진다. 마흔이 넘으니 한 해 한 해 더 빨라지는 것을 몸이 먼저 안다. 다행히 이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전세계 과학자들이 여러 이론과 실험을 통해 입증해왔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바로 도파민 분비에 관한 이론이다.


나이가 들면 뇌의 기억중추를 자극하는 기능이 있는 호르몬인 도파민 분비가 약해진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새로운 기억에 대한 자극이 약해지고 별로 기억할 게 없다고 느끼게 되는데, 이로인해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호르몬 탓은 또 아니기도 하다. 똑 같은 삶의 패턴이 반복될 경우에도 시간이 빠르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쳇바퀴처럼 지내다 보면 새로운 기억이 자리잡기 어렵다는 논리다. 결국 호르몬과 생활 패턴이 시너지를 일으켜서, 새로운 기억이 뇌에 자극을 주지 못하게 되는 이치인 것인가. 나도 모르게 빨라지는 시계 바늘. 지금 이순간 내 이야기였다.


브이로그를 찍는 기분으로 오늘 하루를 되짚어본다.




아침부터 이미 많은 일들이 벌어진 뒤 제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오니 급격하게 허기가 몰려온다. 일단 일단 밥을 먹고 조금 멍하니 있다가 설거지를 한다. 참, 설거지를 하기 전에 세탁기를 돌리면 시간을 좀 더 절약할 수 있지.


설거지를 끝내 놓고 잠시 커피 한잔 하면서 쉬고 있다 보면 슈베르트의 ‘송어’(빨래가 끝났다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빨래를 널고 기진맥진하여 시계를 보면 어느새 제이 하교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외투를 입고 다시 집을 나선다. 학교 앞에서 제이를 만나 같이 집에 온다. 학원 가기 전 집에서 30분 정도 쉬는 동안 제이는 간식을 먹는다. 다시 외투를 걸치고 이번엔 집에서 7분 거리에 있는 학원에 데려다주고 집에 돌아온다.


학원이 끝날 때까지 집에서 대기한 뒤 다시 나와 5분 거리에 있는 다음 학원에 데려다 준다. 학원이 다 끝날 무렵 다시 학원으로 가야 한다. 할머니 집으로 하원하면 학원 차량을 이용할 수 있어서 그나마 좀 편할텐데, 아빠가 집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제이는 집으로 직행하길 원한다.


이렇게 집을 들락날락하는 중간에 청소기도 돌리고 어수선한 것들을 정리한다. 잠시 지쳐서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벌써 저녁이다. 다시 학원으로 가서 제이를 집에 데리고 오며 오늘의 걸음수를 확인해본다. 5천 보를 걸었다. 따로 운동이 필요 없어서 좋긴 하다.


아내가 퇴근한다. 구세주다. 저녁은 아내가 준비해주기 때문이다. 내 요리 실력으로 우리 세 식구의 저녁까지 망칠 수는 없으므로 공손하게 기다린다. 아내는 요리를 잘한다. 잘해도 너무 잘한다. 결혼 전에 요리를 해 본 적이 없다는데 공부 잘하는 애들이 학원이나 과외 경험 없다고 하는 말처럼 들린다.


아무튼 하루 종일 회사에서 시달리고 와서는 뚝딱뚝딱 저녁을 잘도 차려낸다. 동시에 세 가지 요리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그게 다 맛있다. 요리를 하면서 정리하는 능력 말고도 이렇게 멀티 플레이를 펼치는 아내를 보면 가히 경이롭다. 가식 하나 안 보태고 존경한다. 이 즐거움을 포기하기 어려우니 앞으로도 계속 해 주길 바란다.


행복한 만찬을 즐기고, 설거지를 하고 나면 순식간에 한두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밤 10시다. 오전 7시에서 밤 10시로 순간 이동한 기분을 느낀다. 이제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라고 제이에게 압력을 가한다.


내 시간은 지금부터다. 밤 열 시에서 새벽 한두 시에 이르는 무렵. 자유를 만끽해야 한다. 볼 것도 읽을 것도 많고, 뭔가 하고 싶은 것들이 넘쳐나는데 내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겨우 몇 시간 남았다. 어? 어? 어? 하다 보니 그냥 하루가 지나간다. 예상 못 했던 일도 아니다. 제이는 학교로, 아내는 회사로, 나는 집에서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일들을 해내야 한다. 거기에서 지겨움을 느낀다는 것은 사치일지도 모르겠다.





“여보, 마스크팩 하나 해줄게.”


아내의 도움으로 마스크팩을 하고 함께 천장을 올려다보며 순삭된 하루를 마주한다. 나는 정말 단순 반복되는 하루를 보냈을까? 등굣길에서 처음 보는 제이의 친구와의 짧은 등굣길 만남, 그 와중에 다이어트 한답시고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삽시간에 먹어 치운 샐러드, 제이를 생각하며 남겨뒀던 소소한 일기. 분명 오늘 하루 어딘가에 분명 새로운 기억이 남아 있었다.


내일 또 리셋되어 비슷한 하루를 보낼 것이다. 그래도 오늘과 똑같은 내일은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허투루 보내지는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자 아득하게 안도감과 함께 잠이 밀려왔다. 새벽 2시에 손흥민 경기 봐야 하는데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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