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언니 이름은 '진실'이다. 유치하지만 학창 시절 가장 많이 들었던 농담은 "진실이 동생 이름은 거짓이야?"였다. 그 당시 꽤 인기 있었던 <서프라이즈> TV 프로그램에 '진실 혹은 거짓'이라는 코너가 있었기 때문이다. 3가지 스토리 중 '가짜'와 '진짜'를 찾아내는 것이며 킬포인트는 '소설 같은 실화'에 놀라는 것이었다. 나는 언니 친구들에게서 '진실이 동생 거짓'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웃기게도 나는 늘 진짜 보다 가짜 스토리를 좋아했다.
'거짓'을 별칭으로 가진 나는 운명적이게도 '소설'을 가장 좋아했다.다른 것보다도 '소설'만이 주는 매력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진실'을 '거짓'속에 숨길 수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나를 드러내는 것에 소심했던 나에게는 못다 한 이야기를 '일기장'보다 '소설'에 쓰는 게 즐거웠던 것이다. 그 누구도 나의 소설 속 이야기의 진실여부를 물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따질 수도 없기에 오히려 솔직하게 쓸 수가 있다. 소설은 늘 '진실 혹은 거짓'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유일한 글이었다.
82년생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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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소설을 봤을 때 나는 68년생 우리 어머니를 떠올렸다. 상상 속 인물은 현존하지 않기에 누군가에게 대입하기에 좋다. 어딘가에 있을 82년생 김지영 씨는 자서전이 아닌 소설 속에 등장했기에 한 명의 개인적인 서사가 아닌 누군가의 서사가 되는 것이다. 나는 소설이 가진 이런 확장성을 사랑한다.
마치 배우가 자신이 살아볼 수 없는 다양한 인물들을 연기해 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처럼 소설에 그런 점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살아볼 수 없는 매력적인 사람의 인생을 살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에 나의 소설 속 인물들은 '부자'보다 '가난'하며 '행복'보다는 '불행'한 삶을 산다. 결국, 나에게 소설이란 대리만족을 위함은 아니었다.
진실된 거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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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을 진짜 사랑하는 이유는 '진실된 거짓'이기 때문이다. 거짓은 진실이 될 수 없으며 반대로 진실 또한 거짓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그 두 가지가 모두 다 공존하는 것이 '소설'이라 생각한다. 현실 세계에 존재하는 작가가 써 내려가는 가짜 이야기는 진실과 거짓을 모두 담고 있다. 소설 속 소설은 가짜겠지만 진짜인 존재로부터 투영된 이야기는 절대로 '거짓'만을 담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진실'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리고 진실이 아니어도 수용하게 된다.
나는 진실도 거짓도 바란다. '가짜 이야기'라는 전제를 깔아 두면 우리는 모두 경계심을 풀고 온전히 스토리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푹 빠져있다 보면 가짜 주인공에게 이입이 돼버리고, 가짜 상황과 환경에 몰입된다. 현존하지 않는 인물의 한 스토리를 통해 방심하고 있을 때 작가가 심어둔 '진심'을 발견하게 된다.
나는 나의 이야기가 사실여부와 상관없이 전달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맞고 틀림도 아니고 옳고 그름도 아닌 그저 하나의 '가짜 이야기'로 남았으면 좋겠다.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든 가상 인물이 나 대신해준다면 조금은 더 솔직하고 진실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