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계시게

시계가 죽은 것이다.

by 다뜨베이더

그는 커피잔에 시계를 기울였다. 초침, 분침, 시침이 차례대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숫자와 눈금까지 완전히 쏟아져버리자 시계는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이제 준비가 끝난 것 같군요. 자! 시작합시다."

그는 두 손으로 커피잔을 잡더니 내용물을 단숨에 입 속으로 털어 넣고 우드득 우드득 씹기 시작했다.

시계는 째깍째깍거리며 말했다.

"아무런 효과가 없더라도 반드시 30분 정도 기다려보고, 그 다음 단계를 진행하도록 합시다."

그는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평생을 시간에 속고 살았는데, 또 나를 속일 셈이오? 게다가 바늘과 숫자, 눈금조차 없는 당신 얼굴을 보고 내가 어떻게 30분이 지났는지 알 수 있겠소?"

시계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시계가 웃을 때는 톱니바퀴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바늘과 숫자... 그리고 눈금이라고요? 하째깍하하째깍째깍. 그것은 당신들을 위한 것이지 나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시간이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간단합니다. 나는 '시계'이기 때문이지요. 단지 당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나는 그동안 얼굴에 바늘과 숫자와 눈금을 달고 살았던 겁니다."

그는 조금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그렇다면 30분 후에 일러주시오."

남자는 잠시 눈을 붙였다. 이제 30분만 더 기다리면 그는 시계가 말한대로 '시간을 멈추는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잠에서 깬 남자는 흠칫 놀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날은 이미 어두워진 뒤였다. 그렇다면 30분이 아니라 이미 3시간도 더 지난 것이 분명했다.

시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남자는 시계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이 사기꾼! 배신자! 30분은 이미 지나버렸잖소!"

남자가 멱살을 잡고 흔들자 시계는 힘없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남자는 멍한 표정으로 시계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의 몸은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시계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고, 차갑고 딱딱했다. 그리고 더 이상 톱니바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계가 죽은 것이다.

남자는 절규하며 시계를 마구 흔들고 손바닥에 탁탁 치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래도 아무런 변화는 없었다. 그는 결국 시계를 뒤집어 뚜껑을 열고 배터리를 꺼냈다. 혹시 (+)와 (-)가 바뀌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시계 안에 들어있던 배터리는 양쪽 다 (+)극으로 변해있었다. 끝내 시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로 죽은 것이 분명했다.

새 배터리를 찾기 위해 허겁지겁 선반을 뒤지던 그는 무심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의 이마에는 12, 왼쪽 뺨에는 3, 턱에는 6, 오른쪽 뺨에는 9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고, 코 끝에서는 바늘 세 개가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선가 시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시간을 멈추면 시계는 죽네. 당신의 시간만 흘러가네. 잘 계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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