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떫어?"
감교수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마음에 드세요?" 내가 묻는다.
"역시 옷이 날개예요. 안 그래?" 감교수가 말한다.
"그런데 왜 항상 흰 셔츠예요?"
"뭐가 묻으면 바로 알아야하니까! 하하!"
"저는 오늘 까만 티셔츠인데, 역시 불공평하네요."
"인생은 원래 불공평한 거야. 부잣집 초등학생 같은 소리 좀 그만 해요."
나는 감교수의 셔츠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온다. 감교수는 마지막으로 거울을 들여다보고 뒤따라 나온다. 새 옷을 입어서 그런건지 어딘가 모르게 감교수의 모습이 비장해보인다. 우리는 다시 정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자네가 아마... 네번 째 정원까지 갔었지?"
"네. 그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어요."
"맞아. 자네가 첫번째 정원에 들어가던 날 프랭크 시나트라가 죽었어요.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어."
나는 잠시 말을 멈춘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거겠지?"
"뭐랄까요... 말로 내뱉는 순간 달라져버려요."
"그래도 한 번 말해보지 그래?"
"애가 타서 죽을 것 같아요. 말 그대로. 절박해요."
"하하! 역시 엄살로 밖에 안 들리는군."
나는 감교수에게 위로를 받는 건지 놀림을 당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어느덧 정원 입구에 당도한다. 20여년 전의 그날 처럼 같은 장소에 함께 서있다. 그날은 첫번째 정원으로 들어갔지만, 오늘은 다섯번째 정원으로 들어갈 것이다. 라고 나는 믿고 있다. 하늘은 맑고 이따금 새소리가 들려온다. 얼굴에 주근깨가 나있는 그 새 일지도 모른다. 연못의 잉어와 한 끼에 세 끼만큼 밥을 먹던 그 친구도 떠오른다. 이 정원 안에서 참 많은 추억을 쌓았다. 다시 이 자리에 서니 왠지 심장이 따끔거리는 것만 같다. 배멀미를 하는 사람처럼 속이 메스껍고 목이 칼칼하다.
"자네가 언젠가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있어요." 라며 감교수가 입을 뗀다. "어떤 소리요?"내가 말한다. "이 모자 한 번 써보면 안 되냐고." 하고 감교수가 웃으며 말한다. 나는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모자는 당신이 죽은 다음에나 써보라던 그 말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잠깐만요."
“죽을 것 같은 그 기분, 내가 모를 것 같아요?”
“아니, 교수님. 잠깐만요.”
“들여보내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 죽을 것 같은 고통? 하! 그럭저럭 견딜만한 고통은 고통이 아니야. 못 견딜 줄 알았던 것을 견뎌낸 다음에서야 그때 비로소 고통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예요.”
“지금 뭐 하시려고요?”
“왜, 떫어?"
그 다음에 내가 무슨 말을 할 겨를도 없이 감교수가 모자를 벗는다. 물렁물렁한 홍시의 꼭지를 잡아뽑듯이 초록색 모자를 잡아당긴다. 모자에 검붉은 씨앗이 붙어나온다. 감교수의 얼굴이 세로로 찢어져버린다. 나는 지금 보고있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나는 환상을 품은 것일까.
"쓰고 이제 가." 감교수의 머리에서 뽑혀져나온 씨앗이 나를 보고 말한다. 씨앗은 땅에 떨어지고 감꼭지를 닮은 초록색 모자만 덩그러니 남는다. 나는 모자를 집어 머리에 얹는다. 철컹. 하고 다섯번째 정원의 문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