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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20. 2020

<연재소설> 영원의 정원 / 제8장 향기의 정원

"나는 너의 소울메이트야."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


  감교수의 안내로 나는 첫번째 정원에 들어선다. 어딘가 비현실적이고 수상한 구석이 많은 인물이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파격적인 조건으로 이 곳에서 일하게 된 것 자체가 오히려 더 비현실적이다.


  고요한 정원에 햇살이 감돈다. 처음 와 본 곳이지만 오래전부터 알던 곳 같은 느낌을 받는다. 혹시 모른다. 내가 어릴 때 뛰어놀던 풀밭이 여기 어디 근처일 수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진 정원이다. 입구를 들어서면 자연스레 연못으로 향하는 자갈밭을 건너가게 되어있다. 자갈밭에는 간결한 모양의 징검다리가 놓여있다. 한 발 한 발 걸음을 재는 재미가 있다. 양 옆으로는 낮은 소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소나무는 가지를 뻗고 뾰족한 잎을 내밀어 서로 닿을락 말락 하게 자라 있다. 하늘을 향해 무수히 많은 바늘을 뿌려놓은 것 같다. 곂치고 곂친 침엽수의 그 가느다란 틈으로 햇빛이 쪼개진다. 햇살은 '태양신 라'의 머리칼을 연상케 한다.

  나는 소나무를 피해 고개를 약간 숙이면서 그 길을 지난다. 연못 앞에 다다르자 건너편에서 작은 소녀가 총총 다가온다. 소녀는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뒷주머니에 커다란 구형 휴대폰을 꽂고 있어서 한쪽 엉덩이만 툭 튀어나와 보인다. 턱까지 내려오는 단발머리가 얼굴을 동그랗게 감싸고 있다. 얼굴에는 여드름이 몇 개 나있고, 눈이 작다. 그러고 보니 코도 작고 입도 작다. 
 

 "안녕? 넌 누구니?" 내가 묻는다.

 "안녕? 나는 너의 소울메이트야." 소녀가 아리송한 대답을 한다.

 "여기 어른은 없니?" 내가 묻는다.

 "나도 커서 어른이 될 거야." 소녀가 말한다.

 "그래도 아직 어른은 아니잖아." 하고 나는 빙긋 웃으며 말한다.

 "그런 건 다 정도의 차이야." 하고 소녀가 말한다.
 

  나는 물끄러미 소녀를 바라본다. 다시 보니 얼굴에 비해 눈이 무척 큰 편이다. 마치 고양이의 얼굴을 보는 것 같다.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진 고양이 소녀. '혹시 이 아이를 돌보는 게 나의 업무인가?'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어찌 되었건 정원 관리인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다른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김치볶음밥 먹을래?" 소녀가 갑자기 묻는다.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응!" 하고 나는 대답한다. 소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싫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소녀와 단둘이 있는 상황이 왠지 모르게 어색하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다시 주방으로 총총 들어간다. 뒤를 돌아보며 "아무것도 손대지 마." 하고 말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본다. 마루 밑에는 오래된 장작이 쌓여있다. 찢어진 창호지 안으로 아주 조그만 서재가 보인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서재 안을 들여다본다. 칼릴지브란의 시집 몇 권과 에세이가 보인다. 그 옆에는 사전이 여러 권 꽂혀있다. 고등학교 교과서와 문제집 같은 것도 보인다. 나머지 책들은 아랍어로 쓰여있어서 읽을 수조차 없다. 서재를 훑어보던 나는 제일 끝에 꽂힌 제목 없는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양장제본의 제목 없는 책. 나는 이게 책이 아니라 노트임을 알게 된다. 소녀의 일기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무것도 손대지 말라는 소녀의 말을 어기고 나는 그 일기장을 펼친다. 그리고 결국 그 안에서 소녀의 비밀을 보고 만다. 그녀에게는 상처가 있다. 도저히 금방 나을 수가 없는 상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상처. 백번 천번을 쓸어내린 상처. 쓸어내리다가 다 헐어버린 상처. 죽음에 이를 수도 있는 상처. 마음의 상처. 어른이 준 상처. ‘여기 어른은 없냐’고 묻던 나 자신이 한심해진다. 나는 조용히 일기장을 원래 위치에 꽂아둔다.


“놀랐어요?”


나는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쳐다본다. 뜻밖에도 거기엔 감교수가 서있었다.


“‘놀랐어요?’라는 말로 놀래키는 사람은 또 처음 보네요.” 내가 말한다. 

“저 소녀 기억 안 나?” 감교수가 묻는다.

“오늘 처음 만났는데, 무슨 기억을 말하는 거죠?”

“차차 알게 될 겁니다.” 감교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소리를 내서 웃는 것도 아니고 눈모양이 변하는 것도 아닌, 입모양만 변하는 그런 미소다. 나를 궁금한 것 투성이로 만들어 놓고 그는 또다시 자취를 감춰버렸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김치볶음밥을 가지고 돌아온 소녀는 다행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내 감정은 이상하리만치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작은 소녀가 감당할 수 있는 상처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메운다. 그 변화를 들키지 않기 위해 김치볶음밥을 단숨에 먹어 해치운다. 


“맛있어?”

“응”

“겨우 그거야?”


  소녀는 시원찮은 내 반응에 실망한 듯 저만치 떨어진 책상으로 가서 앉는다. 책상 밑에서 나이키 운동화 상자를 꺼낸다. 상자는 자질구레한 액세서리와 학용품, 코팅된 나뭇잎 책갈피, 엽서와 편지봉투 같은 걸로 가득 차 있다. 소녀는 그 안에서 카세트테이프와 연필 한 자루를 꺼낸다. 카세트테이프 한쪽 구멍에 연필을 넣고 빙글빙글 돌린다.   


  "밤이니까 야상곡을 들을 거야." 소녀가 새침하게 말한다.


  밤이 된 것도 모를 정도인가. 


  “설마 밤이 된 것도 몰랐나?” 또 어디선가 나타난 감교수가 묻는다. “네. 그렇네요. 솔직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내가 말한다. 


“소녀를 잘 봐요. 너의 첫사랑이잖아. 너의 소울메이트. 기억 안 나요? 고등학교 때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그 간사한 자에게 속아서 농락당한 너의 첫사랑이잖아. 방금 일기장에서 읽었을 텐데?”


  나는 할 말을 잃는다.


  “지금은 소녀가 가엾어 보이겠지. 안쓰럽겠지. 근데 뭘 반복하려고 그래요? 자네가 또 상처를 주고 더 큰 고통을 줄 게 뻔한데. 나는 자네를 아주 잘 알지요. 이번엔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나는 당장 자네를 발라(spread)서 저 자갈밭에 버무려 버릴 수도 있다고. 오늘 밤 당장 떠나요. 마루 밑 장작을 치우면 거기 통로가 있어.”  

  감교수의 모습은 또 온데간데없다.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쇼팽의 녹턴 2번 야상곡이 들려온다. 그 멜로디가 나를 다시 현실세계로 인도한다. 내 옷깃을 잡아끈다. 소녀의 시선이 일기장에 머물러있다. 일기장의 갈피끈이 위를 향해 서있다.
 

“봤지?”

“응”

“어디까지?”

“전부 다”


  소녀는 참던 울음을 터뜨린다. 일기장 첫 페이지를 적던 날부터 참아온 울음이다. 나는 소녀를 끌어안는다. 위로해주고 싶다. 사랑해주고 싶다. 


  내 귓가에 대고 소녀가 뭐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놓고 싶지 않다. 더 깊이 끌어안고 손을 넣어 살을 만지고 싶다. 하지만 나는 참는다.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녀에게 더 큰 고통을 주기 전에 어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 

 나는 소녀가 잠든 틈에 몰래 첫 번째 정원에서 빠져나온다. 감교수가 알려준 대로 마루 밑 장작을 다 꺼내자 거기에 내리막길로 이어지는 통로 입구가 보인다. 나는 내리막길을 향해 몸을 던진다.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았어.”  

소녀의 목소리가 이제야 뒤늦게 귓가에 맴돈다. 목소리는 귀를 통해 들은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후각을 통해 좋은 향기가 느껴진다.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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