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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키모자이크 Oct 20. 2020

<연재소설>영원의 정원 / 제7장 그 해에 생긴 일

부족함 없이, 넘치지 않게.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백악관 인턴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가 폭로되었다. '좁은 의미의 성관계' 라던가, '특정한 성적 접촉'이라는 표현들이 재판에 등장했다. 어디까지가 '좁은 의미의 성관계'인가. 그렇다면 '넓은 의미의 성관계'는 무엇인가. '특정한 성적 접촉'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오럴섹스의 다른 표현이 그것인가? 하는 공방이 재판정을 오갔다. '지퍼게이트'라고도 불렸던 이 섹스스캔들은 클린턴 대통령을 탄핵의 위기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그는 중간선거에서 대승을 거두고 성추문 정국에서 벗어났다. 

 

  '사랑의 묘약'이라고 불리는 비아그라가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복제양 '돌리'는 건강한 암컷을 출산했다. 티베트와 중국 서부에 폭설이 내렸고, 곳곳에서 기상이변과 자연재해가 발생해 사상 최악의 재앙을 남겼다. 프랭크 시나트라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엑스재팬의 히데가 수건에 목을 매단 상태로 사망하였다.


  한편,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북동부에 위치한 '노브고로드'로 휴가를 떠났다. 목적지에 도착한 옐친은 티브이에 출연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단호하고도 명확하게 평가절하가 없을 것임을 말합니다. 내가 휴가를 중단하고 크렘린으로 달려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중략) 우리는 앞서 이를 계산했으며 이 파고에 맞설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러시아에 몰아닥친 금융위기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틀 뒤, 러시아 정부는 모라토리엄** 및 루블화 평가절하 조치를 감행하였다. 이는 사실상 국가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그 결과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통치권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내가 대학에 입학한 1998년의 이야기이다. 금융위기는 러시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나산그룹, 극동그룹, 파스퇴르, 미도파 백화점, 한일그룹, 그리고 계몽사가 부도를 맞았다. 

  아버지는 계몽사의 직원이었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돼버린 아버지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캐나다로 떠났다. 그리고 그 후로 연락이 두절되었다. 나는 졸지에 스무 살의 가장이 되었다. 내 인생뿐만이 아니라 어머니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다. 대학 등록금 문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이 삶의 족쇄가 되었다. 지역신문 구인란을 뒤지며 돈이 되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나는 시궁창이 흐르는 지하감옥에 발목이 묶인 채 한없이 좌절하는 꿈을 매일같이 꾸곤 했다. 그런데 그날의 꿈은 조금 달랐다.




  나는 발목이 묶인 채 캄캄한 영묘(무덤) 석실에 앉아있다. 이곳은 거대한 모래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이집트 사막의 어디쯤이다. 나는 그것을 직감으로 알고 있다. 장면이 바뀐다. 나는 파라오의 궁전에서 노래를 부른다. 나는 가수이고, 내 이름은 카하이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 그녀는 사제이다. 이름은 메레티테스. 그녀는 내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다시 장면이 바뀐다. 내 이름은 라다메스이고 이집트의 사령관이다. 나는 노예로 잡혀온 한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녀의 이름은 아이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다. 나는 그녀에게 내 등을 씻으라고 명령한다.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고 하더라도 영혼만큼은 가져갈 수 없어요.” 하고 그녀가 말한다. 장면이 바뀐다. 나는 다시 카하이. 나는 메레티테스와 함께 무덤에서 생을 마감한다. 장면이 바뀐다. 캄캄한 석실에서 나 라다메스는 아이다와 함께 생을 마감한다. 노예로 잡혀온 여자들이 윗옷을 훌러덩 벗고 가슴자랑을 하고 있다.


이 꿈을 꾼 바로 그 날, 정원 관리인이 나를 처음 찾아왔다.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평소에 갈증을 잘 느끼지 않는 편인데, 오늘따라 유독 목이 마르다. 나는 물을 마시기 위해 거실로 나간다. 처음 보는 남자가 현관 출입문에 서 있다. 나는 그를 알아볼 수 없다. 현관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아침햇살 때문에 남자의 실루엣만 보일 뿐이다. 순간 남자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남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위협적인 느낌은 전혀 아니지만, 매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 아직 잠에서 덜 깬 건지도 모른다. 


  "누구세요?" 나는 말한다.

  "정원 관리인입니다." 남자가 꾸벅 인사를 하며 말한다.

  "네? 무슨 정원 말씀이신지?"

  "<아리-정원>이라고 들어봤나요?" 


  나는 지역신문에서 봤던 그 황당무계한 구인광고를 바로 생각해낸다. 내용이 너무 황당해서, 정말 돈 많고 할 일 없고 심심한 누군가가 장난을 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했었다.

             

정원 관리 배우면서 돈 버실 분 / 초보 가능 / 숙식제공 
급여 : 부족함 없이 넘치지 않게.
지원자격 : 내가 선택

  

이런 말도 안 되는 구인광고를 내놓고, 그 관리인이라는 사람이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럼 내가 선택받은 것이란 말인가?

  정원 관리인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정원 관리를 돕는 조건으로 나의 대학 등록금을 비롯한 생활비 -가족까지도 - 전부를 지원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를 거절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혹시 캐나다로 떠난 아버지가 도박이라도 해서 큰돈을 벌게 된 건 아닐까. 이런 황당한 방법으로 나를 지원해주려는 것은 아닐까. 나는 햇살 아래에 누운 고양이처럼 다시 잠을 청한다.




  나는 정원의 입구에 멈춰 선다. 말하자면 첫 출근이다. 정원 입구에는 커다란 감나무가 있다. 감나무에서 느닷없이 감 하나가 땅바닥으로 떨어진다. 감이 데굴데굴 굴러간다. 굴러가면서 점점 커지는 것 같은 착시가 일어난다. 감이 정원 담벼락 뒤편으로 굴러간다. 내 시야에서 사라진다. 사라졌다가 이번엔 걸어 나온다. 감처럼 생긴 얼굴, 감꼭지를 닮은 초록 모자, 흰 셔츠에 양복바지를 입은 사람이 걸어서 오고 있다.


  "안녕! 처음 뵙겠습니다. 반가워!"


  존댓말과 반말을 섞어서 말하는 이상한 사람이다. "아... 저기... 누구세요?" 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나는 감교수. 감교수라고 해요!" 이게 바로 나와 감교수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이 만남이 훗날 내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지 상상조차 하지 못 했다. 멀뚱멀뚱 감교수를 바라만 볼뿐이었다. 


  심리학에 '범주 특정적 결함(category-specific deficit)'이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특정 범주에 속하는 물체나 정보만 인식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클린턴을 승리로 이끈 미국 시민들은 그의 '섹스스캔들'이라는 범주에 대한 '범주 특정적 결함'을 보여준 것인지도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나는 지금 '감'과 '사람'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범주 특정적 결함'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감'과 '사람'을 도대체 어떤 범주로 묶어야 한단 말인가.


  "어서 안으로 들어가 봐요." 감교수가 말한다.

  "네. 감사합니다." 하고 내가 말한다.    

  "제1정원! 그러니까, <향기의 정원>에 온 것을 환영해요. 환영한다!"


각주

* 한겨레 | 1998.08.15 기사에서

* 전쟁·천재(天災)·공황 등에 의해 경제계가 혼란하고 채무이행이 어려워지게 된 경우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서 일정기간 채무의 이행을 연기 또는 유예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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