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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 Jan 10. 2020

가난은 내 몸에 때처럼 붙어서

휴직일기(21) 휴직은 절반이 지났고,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 있고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본다

'나는 가난한가?'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질문을 바꿔본다

'나는 가난하게 사는가?'

답은, 그렇다



나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돈'이다

돈이 없는 상태가 너무 싫어서 어떻게서든 모으고 싶고, 지키고 싶다

그래서 나는 절약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민하느라 아주 비합리적으로 살고 있다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밀어내도 밀어내도 또 다시 생기는 '때'처럼 가난의 기억이 내게 엉겨붙어 바보짓을 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돈으로 시간을 살 때, 나는 시간으로 돈을 산다



난 뭐 하나를 사려면 며칠이고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다

내 취향에 맞는지, 맞다 해도 내게 적합할지 그런 고민만으로도 한참이지만

이것을 이 가격에 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지 고민하느라 시간을 죽인다


마음에 드는 걸 얼른 선택해서 그 효용을 누리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일 테지만

나는 우유 하나를 살 때도 대형마트, 동네마트, 쇼핑앱 등을 다 둘러봐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살고 있는 곳에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에서 우유를 가장 저렴하게 살 수 있지만,

2년 전 살던 동네에서는 15분 정도를 걸어가야 나오는 동네슈퍼의 우유가 가장 저렴해 항상 그 길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아끼는 돈은 많아봐야 500원도 안 되었다


누가 보면 질색팔색을 할 이 청승 맞은 짓이 내게서 떨어지질 않는다

오늘도 1000원 결제를 하면서 일반 결제보다 앱카드 결제가 적립률이 높은 걸 알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걸음을 돌려 재결제를 하고 돌아왔다

그렇게 하면 쌓이는 돈이 50원이었다, 50원이 뭐라고





기업도 없는 셈 치는 1원이 내게는 최소 단위다



그래, 50원이 뭐라고?

50원은 나에게 '돈'이다

땅을 파도 안 나오는, 없으면 서럽고 더러운 돈이라는 것이다


우유를 싸게 사러 걸어가면 아낄 수 있는 돈, 500원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1/N을 할 때 친구가 높여서 보내주는 돈, 700원

아빠나 오빠가 생각없이 ATM에서 돈을 뽑으며 수수료로 버리는 돈, 1300원

만 원도 어찌저찌 쓰다 보면 푼돈처럼 되어버린 이 시대에 나에게 저 진짜 '푼돈'이라 불리는 것들은 여전히 푼돈이 되지 못했다

1원의 500배, 700배, 1300배잖아


재테크 카페에 가보면 '앱테크'라는 말이 있다

앱에서 출석체크를 하거나, 퀴즈를 풀거나, 미션을 달성하면 1원~100원 정도의 포인트 등을 주는 걸 모으는 것이다

처음엔 재미삼아 시작한 것인데, 시간이 남을 때마다 하다 보면 자동으로 돈이 쌓이는 것이라 좋아했는데

지내다 보면 이것들에 얽매여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뭔가에 집중하다가도 정각이 되면 퀴즈를 풀어야 하고, 4시간 마다 물 마시기 버튼을 눌러야 하고..


그래, 이것도 모으다 보니 많을 때는 한 달에 몇 만원도 되긴 하더라

근데 하면 할수록 돈의 단위가 작아진다, 1000원에서 100원으로, 100원에서 1원으로-

이러다 보니 뭔가를 살 때마다 더 돈을 아끼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이렇게 돈을 악착 같이 아껴서 뿌듯하게, 기분 좋게 잘 산다면 괜찮겠지

나는 고민에, 계산에, 선택에, 그리고 이후에 후회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쓴다

그래서 내 이런 노력의 결과를 따져보면 언제나 비합리적이다, 물거품이라는 뜻이다





가난, 너는 불알친구냐 불안친구냐



누구는 자식 자랑을 하면, 누구는 애인 자랑을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 수 있다는데

나는 말 끊이지 않고 할 수 있는 게 가난에 대한 이야기뿐인 것 같다


초등학교 때 아람단을 하고 싶었지만, 단복이 비싸다는 이유로 하지 못하고 조끼 하나만 있으면 되는 RCY를 했다

봉사하는 단체였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그 초라한 조끼가 부끄러웠고 작은 규모가 창피했다

운동장에 아람단, 걸스카웃, 보이스카웃, RCY가 모두 모일 때마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을 걸 후회했다


중학교 때 공부를 잘 해야 나중에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내가 성적을 잘 받아오면 엄마가 기뻐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렇지만 내 머리로는 안 되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고, 그건 '세종학원'에 다니는 전교1등 아이라는 물리적인 존재로 끊임없이 확인되었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데도 전교권 성적을 받으면 잘하는 것이라는 말에도 나는 전교1등 아이의 자신에 찬 그 눈빛이 마음에 더 크게 박혔다


고등학교 때 심화반이 있었는데, 나도 그곳에 속해있었다

보통 야간자율학습이 끝나는 10시 이후에도 학교에 남아 마저 더 공부를 하고 갔기 때문에 엄마들이 순번을 정해서 간식을 돌렸다

우연의 일치였는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피자빵이 간식으로 자주 왔다

처음에는 맛있었던 피자빵이 점점 원성을 사는 메뉴가 되어 갈 무렵 한 친구의 엄마가 치즈오븐스파게티를 돌렸다

그 다음 차례였던가, 우리 엄마의 차례가 왔다

당시에도 몸이 좋진 않았지만 상태가 아주 나쁘지는 않았던 엄마는 학교 주변이 마인츠돔 베이커리라는 곳에 가서 간식을 주문했다

간식이 오던 날, 나는 피자빵만은 아니길 바랐지만 결국 단가가 가장 저렴한 피자빵이 오고 말았다

그 피자빵을 손에 들고 한숨을 쉬던 한 남자아이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엄마가 어떻게 마련했는지 모를 10여 만 원의 돈이 그렇게 한숨 거리가 되는 것이 너무 싫었다

차라리 우리 엄마 순서가 첫 번째였으면 좋았을 걸, 아니 솔직히 우리집도 치즈오븐스파게티를 보내주는 집이었으면 좋았을걸



기억력도 안 좋은 내게 차라리 어떤 사건이든 감정으로만 어렴풋이 남았으면 좋았을 것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너무 선명하고 구체적이라서 나는 여전히 돈이 없는 게 무섭다


지나고 보면 별 것 아닌 일이라 생각이 들 때도 있고, 이런 사건 하나하나에 일일이 상처받아서 피곤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일상에 겹겹이 쌓여온 가난이라는 단어는 그저 단어가 아니라 소외감, 부끄러움, 창피함, 원망, 부러움,.... 뭐 이런 단어들로 조합된 깰 수 없는 돌덩어리 같은 것이다





처음으로 돈을 포기하고 시간을 택했는데



불안, 우울, 무기력, 분노, 슬픔, 배신감, 이 모든 악의 감정들이 내게 만들어준 시간 60일의 병가 중 절반이 지났다

수영 강습에 등록했고, 헬스도 끊고, 미싱을 배웠고, 춤도 추러 다녔다

많은 것을 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도 계속 불안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쉬고 있으면 쉬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고, 무언갈 하고 있으면 이걸 하는 게 맞는지 불안하다


처음으로 돈을 주고 시간을 샀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흘러가는 대로 한 달, 순간의 감정에 따라 살긴 했는데 이게 맞는 걸까


생각해보면 나는 지금도 돈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만약 회사로 돌아가지 않으면(혹은 못하면) 나는 뭘로 돈을 벌고 살 수 있지?'

'내가 이 일을 집중해서 해보면 이걸로 돈을 벌 수 있나?'

'이거 평소에 해보고 싶었는데 돈 많이 들겠지?'

가족은, 친구는, 선배는 내게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찾아보라고, 잠시라도 다 내려놓고 쉬어보라고 했는데 나는 계속 돈돈 하고 있다



나의 생각까지 제멋대로 삼켜버린 가난했던 날들이 남긴 사고방식

빡빡 밀어도 쎄게 밀어내도 자꾸만 생겨나는 이 더러운 때 같은 놈을 어찌 없앨 수 있나


오늘도 하루는 갔고, 때는 하루치 더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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